[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토마스가 제시한 향주덕 믿음과 희망과 사랑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윤리적 사고의 기초로서 고대부터 전수된 플라톤의 4추덕(四樞德)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같은 덕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데에 이런 인간적인 덕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신학대전」, I-II,62,2).
자신이 도미니코회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면서 서약했던 내용은 이러한 덕 이론들과 완벽하게 조화시키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따르면, 정육을 외면하는 ‘순결’, 물욕을 거스르는 ‘청빈’, 명예욕을 무시하는 ‘순종’과 같은 것은 정당화하기가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만일 우리가 신과의 일치라는 초자연적인 목적에서 고찰한다면, 순결은 신에 의해서 조명된 이성의 규칙에 일치하며, 중용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고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순결이 미신이나 허영심에서 지향된다면, 그것은 지나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을 발전시켜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꿈조차 꾸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초자연적인 덕들을 인정하였다. 그것은 바로 믿음(fides), 희망(spes), 사랑(caritas)이라는 ‘향주덕’(向主德, virtus theologiae)이다.
인간적인 덕과 향주덕의 차이
향주덕은 인간의 능력을 신의 본성에 참여하기에 적절하게 해 주는 덕으로, 신과 직접 관계된다. 이 덕들은 인간이 신의 자녀로서 행동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신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이를 인간의 반복된 행위로 얻어지는 ‘획득된 덕’(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성적 덕이나 윤리덕)들과 구별하고자 ‘주입된 덕’이라고 불렀다(I-II,62,1; II-II,24,12).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성사를 받을 때 이 덕이 주입되면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런 활동이 이루어지려면 인간 안에 은총이 상존해야 한다(I-II,62,1). 이처럼 향주덕은 신이 피조물에 부여하는 자유로운 선물이다. 더 나아가 향주덕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며 그 행위에 활력을 불어넣고 특징을 부여한다. 향주덕으로써 통합된 인격은 다른 윤리덕을 더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행복을 이루는 초본성적인 단계로 들어간다.
향주덕으로서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영역에서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대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적 영역에서 믿음과 희망에는 통찰력 부족, 무력함 등의 결함이 있고, 불확실하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믿음과 희망을 덕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향주덕인 희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바람이다.
희망이란 덕의 대상은 참된 행복이라는 “획득하기 어렵지만 가능한 미래의 선”(II-II,17,7)이다. 마찬가지로 믿음과 사랑이라는 다른 향주덕도 신을 대상으로 하고 신의 그르침 없는 권위와 전능한 능력으로 지탱되기 때문에 인간 행위가 지닌 불확실함과 무력함이 없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특성들
이성과 신앙이 대치되는 관계로 이해하는 통상적인 생각과 달리, 아퀴나스는 믿음이 근본적으로 인식의 문제라 이해한다. 믿음 자체가 지성 차원에서 벌어지는 행위이며, 그러한 믿음이 다시 지성을 도와 지성을 완전하게 한다. “믿음은 지성을 완전하게 하는 덕목이다”(II-II,1,1,ad1).
이러한 생각은 이미 믿음을 ‘동의를 통한 인식’이라고 이해했던 아우구스티노의 성찰을 수용한 결과이다. 그렇지만 의지가 지성을 동의로 몰고 가기 때문에, 믿음은 지성과 의지의 합작품이다(II-II,2,2).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은 믿음을 통해 자연 이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신의 선에 참여함으로써 완전해진다. 그 모든 과정에는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
이렇게, 믿음으로써 인간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희망이라는 덕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영생을 갈망하게 한다. 희망은 인간의 활동을 정화하고, 실망하지 않게 보호하며, 버림받을 때 힘을 북돋워 주고,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열어 준다.
지복에 대한 희망을 품는 사람은 이러한 은총을 준 신과 하나 되고자 한다. 사랑이라는 덕은 그 무엇보다 모든 것 위에 신을 사랑하고,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게 한다(II-II,17,6,ad3).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렇게 사랑은 신을 사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확장된다.
아퀴나스는 특이하게도 신에 대한 사랑을 우정(amicitia)의 일종으로 본다. 우정이란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누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친교에 바탕을 둔 상호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신과의 우정 어린 사랑이란 인간의 덕에 바탕을 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초자연적인 친교’(communicatio supernaturali)이다(II-II,23,1).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닦아야 할 덕의 근원이며 귀결이다.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확고하게 하고 정화한다.
향주덕들의 순서와 탁월성
아퀴나스에 따르면, 의지는 지성적 욕구이기 때문에 지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향주덕도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지만, 그 발생의 순서와 탁월성에서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측면을 고찰하면, 그들이 생겨나는 순서는 믿음이 먼지이고 그다음 희망이다. 마지막이 사랑이다.
그러나 탁월성의 순서에 따르면 사랑이 모든 덕을 앞서간다. 아퀴나스는 희망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다. 그러나 희망은 자신을 위해 뭔가를 얻고자 신을 바라고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희망을 불완전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데 비해, 신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사랑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부른다(II-II,17,8).
이렇게 사랑은, 다른 향주덕을 완성한다. 이미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명시적으로 강조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사랑의 대상, 곧 신과의 일치가 인간의 모든 덕, 행위, 열망의 목표이기 때문이다(I-II,62,4).
은총에 대한 강조가 인간 역할의 불필요함으로 연결되지 않아야
향주덕이 신의 은총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운에 따라 지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퀴나스는, 명시적으로 신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의 축적 없이 성령에서 곧바로 생겨난다고 하는 주장을 분명히 반대한다. “사랑은 그 본성상 의지의 행위이다”(II-II,23,2).
초본성적인 행복은 그 자신의 인간적 행위의 발걸음을 통하여 얻어야 한다. 신적 생명에 참여하는 일이 일상적 도구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지만, 인간적인 도구들을 슬기롭게 사용한 결과여야 한다. 이런 도구를 아퀴나스는 ‘초자연적인 도덕적 덕’이라고 부른다(I-II,63,3).
아퀴나스는 향주덕이라는 기본 원리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덕을 제시하며 4추덕으로 되돌아간다. 현명은 지복을 얻기 위해 구체적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숙고할 것이며, 정의는 의지가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게 하고, 용기와 절제는 감각적 욕구가 이런 신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돕는다.
이제 덕에 관한 아퀴나스의 거대한 구상이 완성되었다. 고대철학에서 수용한 덕들을 향주덕을 통해서 초본성적인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그렇지만 신의 은총은 인간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자기 행위의 결정자’인 인간은 향주덕 안에서 인간적인 덕을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7월호, 박승찬 엘리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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