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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14회

굿뉴스 2019-08-17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다섯 가지 길 -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는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이성적으로 성찰한 뒤 많은 증명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과학자는 종교를 ‘인간 욕망의 투사’로 바라보며 미신처럼 취급한다.

 

예컨대 베스트셀러가 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God the delusion)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중세의 신 존재 증명을 현대 과학의 처지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난센스로 취급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 존재 증명의 성공 여부와 효용성에 대한 논쟁이 재점화되고 있다.

 

만일 특정 종교가 믿는 신이 그 존재마저 확신할 수 없다면, 이를 토대로 쌓아 올린 모든 교리 체계와 조직은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가 자연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과연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중세의 신 존재 증명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Quinque viae)이다. 이 증명은 「신학대전」의 방대한 내용 중에서도 학자들에게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제1부, 제2문제에서 두 가지를 시도한다. 먼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1절과 2절), 두 번째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3절).

 

이미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자신의 ‘존재론적 증명’을 통해 아무런 전제 없이 순수하게 이성적인 추론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시도했다. 이와 달리 아퀴나스는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만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험적인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성적인 추론의 도움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세계 운동 변화에서 출발하는 첫 번째 길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는 첫 번째 사실을 세계 속에서 체험 가능한 운동 변화에서 찾는다. 이러한 논증의 특성은 다른 네 가지의 길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아퀴나스는 “(1) 이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 사실은 감각으로 확인된다.”고 말한다.이는 장소의 이동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변화하는 것 모두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자면, 이 모든 운동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가능태’(dynamis)에서 그 운동의 목적이 이루어진 ‘현실태’(energeia)에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아퀴나스는 “(2-A)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진다.”라고 표현한다.

 

이를테면 캠프파이어를 하려고 쌓아놓은 장작더미를 생각해 보자. 불에 탈 수 있는 나무는 뜨거운 불에 의해서만 현실적으로 타는 나무가 될 수 있다. 그 나무는 타기 전에는 불에 탈 수 있는 가능태이고, 타고 있다면 현실태로서 불에 타는 상태이기 때문에, 같은 관점에서 가능태이며 동시에 현실태일 수는 없다. 따라서 쌓여 있는 나무 장작은 그 나무와는 다른 현실적인 불에 의해서만 탈 수 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2-Ba) 그러므로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 아퀴나스는 여기서 증명의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 “(2-Bb)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라고 덧붙인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Z를 Y가 움직이게 했고, 또 Y를 X가 움직이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계속해서 올라갈 경우 Z→Y→X…C→B→A와 같은 연속적인 계열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A를 처음으로 움직이게 하는 자(제1동자)라고 생각하면 B부터 Y까지는 모두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 움직여지고, 따라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제2동자이다. 그러나 제1동자 A가 없다고 가정하면 B가 움직일 수 없고, 그렇다면 C도 움직여지지 않음으로 그 이하의 모든 제2동자와 최종적으로 움직여지는 Z까지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한 계열로 소급된다는 말은 제1동자가 없다는 말이므로 이 세계에는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전제 (1)과 모순이 되므로 허용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3)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지만, 처음 움직이게 하는 자(제1동자)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제1동자’는 다른 것으로는 변화되지 않고, 모든 것을 움직여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가능태도 포함하지 않는 순수현실태이다. 아퀴나스는 모든 사람이 이를 ‘신’이라고 이해한다는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증명을 완성한다.

 

 다른 길들을 통한 신 존재 증명

 아퀴나스의 둘째 길과 셋째 길은 첫째 길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둘째 길에서는 이 세계 안에서 발견하는 능동인의 질서에서 제1원인에 도달하고, 셋째 길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偶然有]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존재의 근거를 자기 스스로 가진 자체 필연유에 도달한다.

 

넷째 길은 신플라톤주의의 사고에서 수용한 것으로 이 세상 안에 완전성의 단계가 존재한다면 그 원인이 되는 ‘최고 완전자’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길은 가장 오래된 증명에 속한다. (1)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이성이 결여된 사물들이 목적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우주 안에서 매우 다양한 사물이 그 자체의 선과 전체의 선을 이루고자 조화롭게 잘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원자 세계에서 광대한 천체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유기물의 세계인 식물계에서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뿐만 아니라 벌과 개미 등 동물의 습관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신체 구조계에서 잘 나타난다. “(2)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3)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으로 질서 지어 주는 어떤 이성적 존재가 있다. (3') 이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이 지닌 의의

 ‘다섯 가지 길’을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퀴나스는 실재하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존재와 본질이 일치하는 필연적 존재인 신과, 존재와 본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우연적 존재인 피조물을 구별한다.

 

이어지는 질문들에서 그는 ‘자립하는 존재 자체’인 신이 지닌 속성을 탐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3-11문제). 이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를 그리스도교의 창조설과 연결함으로써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어선다. 곧 신이야말로 각 사물에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서 존재를 부여하신 분이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이라는 신 존재 증명이 근대적인 증명의 엄격성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자연학적인 원리들은 근대 과학의 발전으로 의문시되거나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퀴나스가 도달한 제1원인 등의 원리들이 그리스도교의 신과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가진 형이상학적이거나 신앙적인 전제에 따라 어떠한 종류의 신 존재 증명을 인정하거나, 일부 또는 일체의 신 존재 증명을 부정할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지닌 강한 전제 때문에 신에게 가는 길이 막힌 이들에게는 그 장애물을 상대화함으로써 ‘이성적인 근거에 기반한 신앙에로의 초대’를 제공하는 일은 여전히 시도할만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더욱이 세속적인 학문인 자연 과학, 역사학, 법학 등에서 이른바 ‘증명’ 또는 ‘논증’하는 방법이 다양한 것처럼, 과학적인 실험 방법을 원천적으로 벗어나는 실재에 대한 접근법에 대해서 열려 있을 수는 없는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신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근대 과학의 발전을 근거로 지나친 주장을 펼치는 ‘과학주의’의 숨겨진 전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거울의 역할만으로도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박승찬 엘리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