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매경칼럼)
[허연의 책과 지성] 히틀러는 친절한 이웃이자 채식주의자였다.
리처드 랭엄 (1948~)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전적으로 악하지도 않다."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폭력성·관대함 탐구한 진화학자
- 허연 기자 / 입력 : 2021.01.02 00:08:01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랭엄은 젊은 시절 제인 구달의 조수로 탄자니아와 우간다에서 유인원 연구를 한다. 랭엄은 특히 폭력과 평화가 쌍둥이처럼 공존하는 침팬지 집단을 보며 인류 진화의 일면을 발견한다.
랭엄은 최근 펴낸 책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The Goodness Paradox)`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성의 아주 기이한 점은 인간의 도덕적 범위가 말할 수 없이 사악한 데서부터 애끓도록 관대한 것까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인간성`이라고 말하는 한 인간의 속성에는 놀라울 정도의 `사악함`과 `관대함`이 공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랭엄은 인류사에 큰 패악을 저지른 세 사람의 사례를 거론한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는 평소에는 친절한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동물 학대조차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자국민의 4분의 1을 죽이는 만행의 주범인 캄보디아 폴 포트는 원래 친절한 역사 선생님이었다. 소련의 악명 높은 독재자 스탈린도 마찬가지. 그와 함께 감옥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그를 "놀랍도록 조용하고 유순한 모범수"였다고 기억한다.
이들은 후천적으로 악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인가, 아니면 타고난 악인 기질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힘겨루기를 해온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결이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다.
랭엄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일축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전적으로 악하지도 않다. 우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화를 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인간 내부에는 선과 악이 같이 있다는 말이다.
유인원들에게서도 폭력과 관대함은 동시에 관찰된다. 물론 차이는 있다. 인간은 유인원과는 조금 다른 측면으로 진화해 왔다. 인간은 진화를 거치며 반응적(reactive) 공격성은 순치됐고, 주도적(proactive) 공격성은 강화됐다.
반응적 공격은 누가 나를 건드리거나 자극했을 때 버럭 화를 내는 것과 같은 `일대일 대응`이다. 주도적 공격성은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공격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길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반응적 공격`이고, 유대인 학살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 전략적으로 계획하고 실행되는 폭력이 `주도적 공격`이다.
유인원사회에서는 반응적 공격이 빈번히 일어난다. 인간은 유인원에 비해 반응적 공격의 빈도가 1%밖에 안된다. 하지만 전쟁과 학살 같은 주도적 공격은 인간이 유인원보다 훨씬 심하다.
인간은 공동체 내의 반응적 폭력은 사형제도와 같은 극단적 처벌로 관리하면서 진화해 왔다. 하지만 공동체의 경계를 넘으면 오히려 더 잔인해지는 속성은 순화되지 않았다.
랭엄은 "우리는 일상에서는 매우 낮은 수준의 폭력을 행사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은 매우 높다"고 말한다. 옆집 사람과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면서 살지만, 국경을 넘으면 고성능 폭탄을 죄책감 없이 퍼붓는 인간의 모순은 앞으로 또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사뭇 궁금하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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