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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⑤ 지옥문의 비명(碑銘)

가톨릭신문 : 발행일2021-03-07 [제3234호, 13면]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⑤ 지옥문의 비명(碑銘)

 

절망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지옥이 된다

지옥은 희망 보이지 않는 영원한 불 / 특정 장소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 가능 / 절망은 곧 하느님과의 단절 의미

 

 

나를 거쳐 비통한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멸망한 무리 사이로 들어가노라.

정의는 내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여, 천주의 권능과 최상의 지혜와 최초의 사랑이 나를 만드셨노라.

나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은 영원한 것들뿐, 나도 영원히 존속하리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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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지옥문에 쓰인 무서운 글귀를 보았다. 지옥문은 일인칭 화법으로 자기를 소개함과 동시에 지옥 전체를 소개하고 있다. 처음 3행은 3번이나 “나를 통해서”(PER ME)를 반복하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지옥문은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있다. 그리고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말한다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마태7,13) 단테는 지옥문을 가리키며 부정관사(una porta)를 사용하고 있다. 즉 지옥문은 어느 특정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아니 그 누구라도 이웃에게 절망이 된다면 바로 지옥문이 될 수 있다.

키르케고르(1813~1855)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절망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지옥이 된다. 지옥이란 모든 희망을 버린 장소이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것이 지옥의 정의다. 가브리엘 마르셀(1889~1973)은 절망은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과의 단절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절망은 심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이다. “나는 하느님을 희망한다(J’éspère en Toi).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그의 희망의 철학이었다.

                                                    로댕 ‘지옥문’.(1880~1917)

 

지옥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와 사랑이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정의를 중시하면서 창조하였다. 천지창조 직후 사탄과 그 반역의 무리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하느님은 그들을 가둘 지옥을 만드셨다. 성경에서 지옥은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마태 25,41)로 묘사된다.

 

그곳에서는 “탄식과 울음과 고통의 비명만이 별빛 없는 대기 속으로 울려 퍼진다.” 지옥의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철학자 이마미치 토모노부(1922~2012)에 의하면, ‘별’이라는 말에는 적어도 네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 별은 희망이다. 영화 ‘스타 탄생’과 무용극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우리는 현재의 영광과

      장래의 희망을 한 몸에 지고 있는 사람을 스타라고 부른다.

둘째, 별은 인도자이다. 성모 마리아를 ‘바다의 별’(海星, stella maris)이라고 부르듯, 별은 밤바다에서 방향을 가리켜

     준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c.1090~1153)는 말한다. “별을 보고 마리아를 부르자.”

     (Respice stellam, voca Mariam)

셋째, 별은 이상(理想)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에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새로운, 아니 커지는

     감탄과  숭경(崇敬)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률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이 문장은 바로 칸트의 묘비명이 되었다고 한다. 니체는 말한다.

     “이윽고 별이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별 볼 일 없는’ 현대의 도시는 이상향(理想鄕)이라기보다는

      지옥에 가깝다.

넷째, 별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인다.

그런데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어찌하여 지옥을 만드셨나?’라는 물음이 종종 제기된다. 즉 무한한 사랑과 절대적 정의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연옥 교리가 없던 시절, 오리게네스(184-254)는 “예수님께서는 만물이 복원(apokatastasis)될 때까지는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사도 3,21)를 근거로, 총체적 구원론 이른바 만물 복원설을 주장하다가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것은 결국 지옥 해체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에게 죄인의 벌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치료용이자 교정용이었다. 그는 언젠가 모든 영혼이 하느님께 돌아간다고 믿었다.

신학자 발타자르(1905~1988) 또한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희망해도 될까?」라는 소책자를 냈다가, “모든 사람은 구원되겠지만 발타자르 자신만은 혼자 지옥에 남을 것이다”라고 조롱을 당했다. 그러나 칼 라너(1904~1984)가 말한 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원히 멸망할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지옥은 발터 카스퍼(1933~)의 말대로, 객관적 확실성이라기보다는 회심과 회생(回生)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현실적 가능성이다.

과연 지옥은 있을까? 파스칼(1623~1662)은 말한다. “없다면 다행이지만 있다면 정말 큰 일이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본래 지옥문 위에 앉아있었다. 오늘도 그는 마치 단테인 양 비참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