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속 시리즈물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9)신앙의 가족 – 혈연의 유대를 넘어 신앙의 연대로

가톨릭신문 : 발행일2021-05-02 [제3242호, 12면]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9)신앙의 가족 – 혈연의 유대를 넘어 신앙의 연대로

 

정직한 대화와 돌봄에서 참된 친밀성의 공동체 형성된다

가족의 혈연적 우애 안에서 인간관계 친밀성 배우지만 점점 해체되는 오늘날 가정서 동일한 경험하기 힘들어져
친밀성은 만들어가는 것
타인을 믿고 환대하면서 일상 중 자연스럽게 발생 신앙인들은 늘 성찰할 부분

 

오늘날 진정한 친밀성은 혈연의 친밀성이라기보다 신앙의 친밀성이다. 일상 안에서 정직한 말의 나눔이 이루어지고, 관계에 대한 책임과 서로에 대한 돌봄의 정서에서 친밀성이 형성된다.

 

■ 우리는 몸과 말의 인연으로 살아간다
교구 사제로 살고 있다. 신학교 시절을 교구 동료 사제들과 함께 지냈고, 사제로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교구 사제들과 시간적 공간적 접촉이 가장 많다. 늙어가는 요즘 돌아보면, 긴 시간을 함께 지내온 교구 동료 사제들이 애틋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교구 사제들이 나에겐 가족이며 동료다. 교구라는 지역 안에서 우리는 사목적 지향을 공유하며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같은 교구라는 속지주의적 인연이 우리를 동료로 묶고 있다.

사제로 살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는 교구 밖의 동료들이 있다. 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던 사제들이다. 해외에서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제, 수도원에서 조용히 자신을 수련하는 사제, 이 둘의 인연을 통해 알게 된 어느 주교님, 이 셋과 말이 잘 통한다. 그리고 신학교 선생 시절 알게 된 동료들이 있다.

 

말이 통하는 제자 신부들이다. 물론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 신학교에서 그저 선생과 학생으로 만났을 뿐이다. 이젠 같은 길을 가는 동료다. 이들과 가장 편하게 수다를 떨 수 있다. 나만의 일방적 느낌과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젊은 신부들이 무척 좋다. 그들이 펼칠 새로운 교회를 상상하고 기대한다.

■ 혈연 가족주의를 넘어
우리는 혈연적 친밀성을 통해 인간관계의 친밀성을 느끼고 배운다. 혈연적 가족은 인간이 친밀성을 느끼고 배우는 최초의 자리다.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 속에서, 혈연적 형제자매라는 관계 속에서 인간관계 안에 존재하는 사랑과 우애와 친밀성을 경험한다. 가정에서 체험한 형제적 우애와 친밀함이 사회 전체로 연장되고 확장될 때 세상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종교가 사랑과 친교의 공간으로서 가정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사실, 모든 사회는 가족 제도의 안정성 토대 위에 사회적 가치와 이념 체계를 세운다. “가족은 사회적 가치와 이념들이 투입되는 장소이며, 종교는 이를 검정하고 확인하는 양식이다.”(테오도르 제닝스) 하지만 오늘의 가정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한 자녀로 구성된 가정, 다양한 이유로 점점 해체되어 가는 오늘의 가정 속에서 우애와 친밀성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지. 자본주의적 삶의 환경 속에서, 즉 경쟁과 생존의 전장에서 마지막 부족주의적 토대인 가족에 대한 집착은 이기적 ‘가족주의’라는 괴물만 양산한다. 사실, “한국만큼 ‘모든 사회 문제는 가족 문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김희경) 가족주의와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너무 지나치게 작동되고 있다.

복음서의 예수는 가족에 대해 비판적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는 혈연적 유대에 대해 단호하고 매몰찬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 마리아가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으로 표상될 때뿐이다. 마리아의 자리는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믿는 자로서의 자리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약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복음서 해석에 있어서 여러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혈연의 유대를 통한 전통적 가족보다 신앙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를 강조한 것은 틀림이 없다. 예수는 항상 “가족 사랑이 아니라 이웃 사랑, 즉 가족 아닌 것(the unfamiliar)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김영민)를 말한다.

■ 돌봄과 연대의 공동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가족 관계 안에서의 역할과 책임에 관한 이야기와 정상 가족을 넘어 새로 형성되는 가족 형태들에 대해 따뜻한 눈길을 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는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떠난 아버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세 자매를 버린 엄마로 인해 상처의 기억을 가진, 서로 개성이 다른 세 자매가 이복 자매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영화는 그들의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을 담지 않는다. 서로 말을 나누고, 함께 밥을 먹는, 일상의 시간이 쌓여가면서 네 자매는 그렇게 가족이 된다.

‘어느 가족’(2018)은 한집에 모여 사는, 하지만 모두 핏줄이 다른 여섯 명의 가족 이야기다. 이들이 어떻게 한 집에 모여 살게 된 건지, 이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한집에 모여 각각 아버지, 어머니, 이모, 아들, 딸 그리고 할머니로서 ‘가족’을 구성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세상의 행복 기준과는 별도로 그들은 그들만의 리듬으로 행복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 비정상적(?) 가족은 법과 제도에 의해 잔인하게 파괴되고 해체된다.

영상을 글로 옮기면 무언가 허해진다. 두 영화를 한 번 보시라. 환한 따뜻함과 저릿한 슬픔이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전해질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필연적 운명의 가족보다, 우연한 선택과 서로에 대한 인간적 돌봄과 정서적 연대를 통해 결속된 가족이 때때로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의 역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친밀성과 신앙의 연대
현대사회는 “친밀성의 구조변동”(앤서니 기든스)을 겪고 있다. 혈연의 가족이든 숱한 인연들을 통한 사회적 결합이든, 즉 그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했든 간에 공동체적 결속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의 민주화, 정직한 대화, 돌봄과 정서적 연대, 신앙의 환대일 것이다.

 

모든 공동체의 기본 원리는 환대여야 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김현경) 사람은 하느님 모상이기에 그 자체로 존엄과 신성함을 지닌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신원과 정체성을 묻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환대다.

친밀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친밀성은 혈연의 친밀성이 아니라 신앙의 친밀성이다. 규범적으로 주입되고 강요된 친밀성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파생하는 친밀성이다. 일상 안에서 정직한 말의 나눔이 이루어지고, 관계에 대한 책임과 서로에 대한 돌봄의 정서에서 친밀성은 형성된다. 이러한 친밀성은 일상생활의 민주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참된 친밀성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지, 부족주의적 유대가 아니라 신앙의 연대를 지향하고 있는지, 늘 성찰할 일이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

 

친밀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백번 맞는말 천성적으로 친밀성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우리자신들이 만들어가야 한다 혹여 상대가 맘에 안든다고 하더라도 친밀하려고 노력해야 

 

진정한 친밀성은 혈연의 친밀성이 아니라 신앙의 친밀성이다. 하고 했지만 글쎄???

처음에는 혈연친밀성이 두드러지다가 좀 크면 신앙의 친밀성이란 말같은데 신앙안에서 친밀성이 말처럼 쉽지않다 

신앙안에 많은 단체들이 있다 이 단체안에 들어왔다가 상처받고 돌아서는 사람들 많이봤다

 

가톨릭안에서 단체에 들어가지 못하면 백날을 다녀도 얼굴도 모르는 경우있고 얼굴을 알아도 누구인지 잘 모른다

먼저본당 4년넘게 있다가 왔것만 단체장얼굴, 우리구역 반장 얼굴본적 단 한번 없다

그때는 코로나 이전인데도 그들도 나름대로 바뻤겠지만 어쩜 그렇게도 

나도 악착같이 보고싶지 않았다 

 

개신교는 처음보는 얼굴있으면 인사하고 어디서 왔나며 반긴다 그런것은 가톨릭이 본받아야 한다

숫자적으로 개신교는 대형교회 빼놓고는 적은 숫자이니 서로 잘안다

 

가톨릭은 방대하다

매일 나가도 시피했는데도 아무도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필자한테는 그리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세례 받은지 얼마안된 신자들, 어쩌다 교우가 된사람들, 뜨뜻미지근한 신자들, 등쌀에 나오는 신자들은 이러면 등 돌기기 쉽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그나마도 없어졌다 

 

신앙앙의 친밀성이 그야말로 어서 활성화 되었으면 한다

 

괸시리 신부님이 잘 써놓은 글에  토를 잘아서 죄송해요(블.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