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2021-05-30 [제3247호, 12면]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1)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 우주론적 상상
우주적 실재 앞에서 하느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의미는?
신학은 자연 이해하는 것보다 인간 구원에 초점 맞추지만 인간에 영향 미치는 실재에 나름의 설명과 의미 찾아야
신학의 논리 체계 안에서 우주와 생명의 의미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할 수 없지만 과학적 발견은 늘 우리가 새롭게 상상하도록 요청
■ 일상에서 만난 작은 경이(驚異)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학교 도서관에서 학술지와 잡지를 읽는 일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특히 세계 각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학 학술지들을 도서관 한 귀퉁이에 앉아서 읽는 재미는 쏠쏠했다. 학술지를 통해 각 지역의 학문적 특성과 최신 동향을 가장 잘 알 수 있었다.
내 공부의 시작점은 언제나 학술지와 잡지 읽기였다. 그 읽기 가운데 만난 가장 인상적인 글 하나는 예수회 신부 월터 옹(Walter J. Ong)의 짧은 에세이였다. 현대 과학이 발견해낸 우주의 압도적 크기와 생명 진화의 현상 앞에서 창조에 대한 신앙적 신념들과 우리 인간들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정직한 질문과 자신의 솔직한 소회를 적은 글이다.
종교와 과학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발전한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살짝 유치한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0년도의 나에게는 작은 경이감을 선사한 글이었다. 그 글은 적어도 나에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의 시공간적 위치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늘 상상하게 하는 모티프를 제공했다.
요즘 옆집에 살고 있는 동기 신부와 거의 매일 저녁 산책을 한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여서 시골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저녁 무렵의 시간을 걷는 일은, 동기 신부와 내가 누릴 수 있는 하루의 작은 행복이다. 산책이 끝날 때쯤이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동네 끝자락에 있는 작은 다리 위에서 우린 늘 밤하늘을 쳐다본다. 저기 북두칠성이, 토성이, 샛별이, 카시오페아가, 별로 많이 알지도 못하는 별자리 지식이지만, 신기한 듯 어린이처럼 말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별을 보지 못하는 흐린 날은 괜히 기분 안 좋다고 투덜거린다.
별을 보는 순간만은 우리는 늙음의 슬픔도 잊고 어린 시절의 동화로 돌아간다. 또한, 저 우주의 광활함 속에서 우리는 작은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기에 겸손하게 그리고 지금 여기의 삶을 소중히 살아야겠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무의식적 다짐을 한다.
■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인가
오늘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 그 시공간적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 우리는 이제 안다. 물론 자주 잊고 산다. 우리 은하계가 수천억 개의 별들로 되어있고, 우리 은하 역시 1조 개가 넘는 은하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광대한 우주 역시 다중 우주의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천문 물리학 이론들을 접할 때, 비록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잘 상상이 되지 않는 그 압도적 현실 앞에서 내가 가진 신학적 지식과 신념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름답고, 경이롭고, 수수께끼 같은 우주의 현실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신념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한 탁월한 물리학자는 말한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삶을 광대극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하고, 인간의 삶에 한 가닥 비극의 품위를 불어넣는다.”(스티븐 와인버그) 이 서늘한 무신론적 통찰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이 광대한 우주적 실재 앞에서 하느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의미가 무엇일까. 객관적 실재에 대한 신앙 주체적 반응은 교회 안에서 자연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왔다. 신학적 이해와 설명을 통해 신앙적 실존은 안정성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신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보다는 인간의 변화와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위치와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이 압도적 실재에 대해 신학은 나름의 설명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오늘의 자연신학은, 자연 속에 정교한 조율이 있고 자연 현상 안에는 인간중심 원리가 있다는 가설과, 우주의 우연들 속에 어떤 경이의 원인이 있다는 원인론적 관점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알리스터 맥그래스)
광대한 우주의 압도적 현실 앞에서 우리의 신학적 지식과 신념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학의 논리 체계 안에서 모든 것이 명쾌하게 해명될 수는 없지만, 과학적 발견들은 늘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새롭게 상상하도록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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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 진화는 하느님의 자기 비움인가
과학자들은 우주의 역사를 약 138억 년으로 추정한다. 지구의 역사는 우주의 탄생 후 90억 년 뒤에 시작된다. 지구에서 생명의 역사는 지구가 탄생 되고 10억 년 뒤인, 38억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단세포 생명체에서 진화되어 식물이 되기까지는 다시 30억 년이 더 걸렸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는 대략 700만 년으로 추측한다
현생 인류는 400만 년 전 아프리카의 직립 보행인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겨우 25만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문자 이후의 인류사는 만년도 채 안 된다.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생명체 안에 마음과 감정과 의식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떼이야르 샤르댕이 말한 것처럼, 마음은 우주의 시작부터 물질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긴 생명의 진화 여정 속에서 하느님은 어떻게 관계하고 있었던 것일까?
138억 년이라는 엄청나게 긴 진화의 현실 앞에서 하느님의 전능이라는 개념과 창조 교리는 문제에 봉착한 것 같다. 신학과 과학의 공명을 찾는 신학자들은 케노시스 개념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통해 신학적 난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느님은 창조 세계에 부여한 자유를 억누르지 않는다. 자기 비움과 자기 내어줌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다.
능력과 성취라는 인간적 관점에서 보는 전능함이 아니라 당신을 내어주는 사랑에 전능하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창조 세계의 인과관계에 개입하는 분이 아니다. 창조 세계의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케노시스는 자신을 규제하는 비움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의 본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신학자들은 ‘가톨릭’이라는 개념 안에 우주적 보편성을 향한 지향과,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사유와 의식이 담겨있다고 주장한다.
■ 새로운 상상과 겸허함
신학은 신앙적 관점과 사유 체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과 세계(자연)를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신학의 논리 체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명쾌하게 해명될 수는 없다. 신학적 인식과 상상은 그 당대적 상황의 산물일 뿐이다. 사유와 인식의 한계를 고백하자. 그리고 상상력을 조금 확장해보자. “천년도 당신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시편 90,4),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라는 성경적 상상은 오늘의 우주적 상상의 문맥에서 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느님의 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자연의 신비, 즉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운 설명을 할 수 없다. 몇십 억 년 뒤 태양이 늙고 팽창하면 지구는 생명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행성이 되고 화성과 다른 행성이 또 다른 생명의 거주지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몇백 년 뒤의 일도 상상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몇십억 년 뒤의 일은 또 어떻게 상상할 수 있으랴. 하지만 과학적 발견들은 늘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새롭게 상상하도록 요청한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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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에 밑줄 친것은 블로그 쥔장이 가슴에 새기려고 허락도없이 밑줄쳤슴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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