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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4)연대와 성인들의 통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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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05-08 [제3293호, 14면]


나의 인터넷 시작 페이지는 ‘뉴욕타임즈’다. 요즘 인터넷을 열면 우크라이나 전쟁 사진과 소식이 제일 먼저 들어온다. 미국 신문은 왜 남의 나라 전쟁 소식을 가장 중요한 뉴스로 다루고 있는 것일까. 전쟁의 참화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평화에 대한 인식을 상기시키고 환기하기 위해서일까. 비극의 현장에 대한 언론의 고발과 휴머니즘적 연대의 표현일까. 아니면, 정치적 이유 때문일까. 세계 초강대국의 관점과 시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러시아의 침공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일까. 미국 신문에 실리는 다른 나라 전쟁 소식의 밑바닥에 어떤 국제 정치적 역학이 담겨 있는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에 미국 신문들이 그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다루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내가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과 사진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늙어가고 있고 그래서 삶과 죽음의 현장이, 타인의 고통과 아픔이 조금은 더 가까이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쟁의 상처를 겪지 않은 세대다. 어떻게 보면 무척 운 좋은 세대다. 세상의 전쟁은 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은 그저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경험했을 뿐이다.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고, 경북 안동에서 살아가는 나는 일상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 제 운명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정말 타인의 삶과 운명은 나의 삶과 운명과는 별개의 것일까.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인간은 서로 연결되고 연대할 수 있을까.

 

6월 3일, 11월 24일

신학교 선생 시절 좋은 느낌으로 기억되는 축일이 있다.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축일(6월 3일)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축일(11월 24일)이다. 이 두 축일이 되면 ‘아, 방학이 다가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저 좋았다. 6월 3일 축일이 여름방학에 대한 징표로서 즐거웠다면, 11월 24일 축일은 겨울방학을 알리는 예표로서 즐거웠다. 이름도 낯설고 잘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 성인들과 베트남 순교 성인들의 축일이, 답답한 신학교의 시간이 끝나고 조금은 자유로운 방학의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쁜소식의 표지라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방학이 가까이 왔다는 해방의 소식을 미리 전해주는 아프리카 순교 성인들과 베트남 순교 성인들이 참 고마웠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축일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축일이다. 초기 박해시대처럼 아프리카 우간다, 베트남, 한국이라는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는 사실은,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다는 교회사적 명제와 지역교회는 항상 자신의 지역을 뛰어넘는 보편교회로 존재한다는 교회론적 정언을 상기시킨다.

 

또 한편으로 이 축일들은 시간과 공간이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신앙인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와 한계를 뛰어넘어 서로 연대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 축일들은 시간과 공간의 다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신앙인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일치하고 연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가톨릭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교리의 하나인 ‘성인들의 통공’(communion of saints) 교리에 따르면,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살아가도 우리 신앙인은 주님 안에서 언제나 하나다. 사도신경을 읊조릴 때마다 “성인들의 통공”을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자기 생의 운명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신앙인은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운명의 질곡 속에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두 축일과 성인들의 통공 교리는 기억과 기도와 연대 안에서 신앙인들은 보편교회를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연대의 보편성과 우주적 차원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았습니다.”(로마 5,18)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의 말씀은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한 대조를 통해 죄와 은총의 문제 그리고 인간 연대성의 문제에 관한 사도 바오로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붙어있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사도 바오로는 일종의 발생학적으로 또는 원인론적으로 설명했다. 죽음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간에게 죄가 근본적 조건이 된 이유는 인류의 출발부터 즉 아담에서부터 죄가 기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그 출발에서부터 죄와 죽음이라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바오로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죄와 은총이라는 신학적 해석보다는 바오로의 주장 속에 담겨 있는, 사람과 사람의 연대에 대한 깊은 사유다. 인간은 그 출발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연대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다. 연대는 서로를 향한 관심과 기억과 돌봄이라는 윤리적이고 실천적 차원을 지닌다.

더 나아가, 연대는 영성적이고 우주적 차원을 지닌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 안에서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성인들의 통공 교리가 알려주는 그리스도교 연대성은 지금 여기서 온 힘을 다하는 우리들의 눈물겨운 노력들이 다른 시공간을 사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신비를 설명한다. 누가 지켜보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행동이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누가 강요하건 하지 않건 - 우리는 지금 여기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의의 노력들이 세상의 선에 영향을 미치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는 모든 악의의 행위들은 세상의 악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과 노력은 하느님 안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지금도 세상 그 어디에는 여전히 전쟁과 폭력과 억압과 빈곤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가.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