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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21회)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2020-03-22 ㅣ No.576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할 기회를 가진 현대인은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사람들은 인간 이성이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제1, 2차 세계 대전과 환경 재앙 등의 가공할 체험을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영원하고 불변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자,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행복 개념의 수용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이하 모두 STh) 제II부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인간의 궁극 목적은 행복”이라는 전통적인 통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받아들인 내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적 행위가 지닌 목적 지향성에 대한 탐구를 수행한다. 그는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부하는 행위의 목적을 ‘좋은 학점의 취득’이라고 설명했다면, 다시 ‘학점의 취득’은 ‘취직’이나 ‘돈을 버는 것’이라는 더 상위의 목적을 가진다고 설명할 수 있다.

 

보통 목적을 가지고 행위를 설명할 경우 행위 자체는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는데, 어떤 행위의 목적은 동시에 또 다른, 상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곧 선(善)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일,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이 된다면서 어디선가는 더 상위의 목적을 이야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가령 ‘잘 사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은 더는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서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自足的)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궁극 목적’, 곧 ‘최고선’이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궁극 목적을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른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성찰 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행복’이라는 이름을 통해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에서, 곧 행복의 구체적 내용의 이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개별적인 선은 의지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의지의 진정한 만족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복은 ‘보편적인 선(善)’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보편적인 선이란 무엇인가? 아퀴나스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궁극 목적이 될 수 있는 후보들을 하나씩 검토한다.

 

먼저, ‘재물’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궁극 목적이 될 수 없다. 돈은 교환 가치만을 가지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재화나 권리야말로 상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편적 선은 필연적으로 궁극 목적이기에 그 자체가 그보다 상위의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될 수 없다(STh I-II,2,1).

 

그렇다면 인간을 즐겁게 해 주는 ‘쾌락’이야말로 궁극 목적이 아닐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삶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말한다. 또한 쾌락은 단기적이어서 궁극적이거나 자족적일 수 없다. 아퀴나스는 이에 덧붙여서 감각적인 쾌락은 다만 육체를 만족시킬 뿐 전 인간을 완성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 안에 궁극적인 행복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I-II,2,5-6).

 

그렇다면 모든 이가 얻고자 추구하는 ‘명예’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은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며 쉽게 박탈될 수 없어야 하는데, 명예의 경우 명예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결정권자의 위치에 있으므로 타자 의존적이기에, 개인의 진정한 행복이 되지 못한다. 아퀴나스도 이를 받아들이며(I-II,2,2), 더 나아가 궁극적인 행복이 권력에 있을 수도 없다고 강조한다. 권력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원리이고 선뿐만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I-II,2,4).

 

 

아리스토텔레스 행복 개념의 극복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언제 행복해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답하려고 이른바 ‘기능 논변’을 들여온다.

 

우리는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지닌 대상에 대해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해야 할 행위를 ‘잘’(eu)하는 사람에 대해 ‘좋은’ 또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특정 직업이나 분야에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좋은’ 인간이 되게 해 주는 기능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기능을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기능, 곧 이성과 사유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사변적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인간인 셈이다.

 

아퀴나스는 여기서 더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궁극적인 행복은 사변적 학문의 연구 속에도 있을 수 없는데, 철학적 사변은 확실히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궁극적 원인을 본디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열망하지만, 이것은 감각적 경험에서 유래하는 자연적 지식으로 획득할 수 없다(I-II,3,5-6). 이처럼 아퀴나스에게서 완전한 행복, 곧 궁극 목적은 어떠한 피조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지복 직관과 진정한 행복

 

그렇다면 아퀴나스는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그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다만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가 최고의 무한한 선인 신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고 불렀다(I-II,4,4). 지복 직관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기도 하다. 인식과 사랑으로 이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퀴나스의 결론을 보면서, ‘신을 소유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I-II,4,3). 차이가 있다면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노와 달리 아퀴나스는 그 지성적인 인식을 강조하는 점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을 추구했다면, 아퀴나스는 내세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신의 본질을 직관하는 참된 행복을 추구했다(I-II,3,5). 신 이외의 선은 비록 행복에서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지복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곧 불완전한 행복은 내세의 삶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려 현세에서 해 두는 준비라는 것이다.

 

사실상 불완전한 행복에만 도달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삶이지만, 최상의 것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라는 아퀴나스의 일반적인 원리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르면 「신학대전」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며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제II부(I-II, II-II)에서만큼 아퀴나스가 체계화하는 재능을 빛나게 발휘한 대목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구절 중에서 그가 이용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많이 사용하면서도, 윤리학에 내세와 신의 직관을 도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넘어선다. 이처럼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의 윤리와 그때까지 알려진 다른 사상가들의 윤리 사상마저 모두 포괄함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윤리학을 전개해 나갔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3월호, 박승찬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