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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윤리적 행위의 기준은 무엇인가? (22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윤리적 행위의 기준은 무엇인가?

2020-04-17 ㅣ No.580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비로소 가능한, 신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바로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그에 가까워지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지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를 알아보려면 인간 행위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위가 모두 윤리적 또는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행위는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반사적인 행동과 같은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가진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곧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후자만이 윤리적 영역에 속한다.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선한 의도

 

인간적 행위를 더욱 분명히 설명하고자 아퀴나스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탐구한다. 그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의지란 이성적 욕구이며,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선(善), 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의지가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퀴나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고려하면 저지할 수 없고 바로 실행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은 여러 요건에 따라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I,6,4 참조). 이런 측면에서는 의지를 매우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노 전통과도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아퀴나스는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를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행위자가 악한 결과에 책임에 있으려면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를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 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반면에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라고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아퀴나스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할 때, 이 목적을 의도(intentio, 지향)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선거 때 표를 얻으려고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베푸는 행위는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처럼 아퀴나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먼저, 주관적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악한 의지를 지녔다면 악한 행위가 되지만, 의지가 선하려면 선한 의도만으로는 안 되고 이성이 제시한 선한 대상을 바르게 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객관적인 선을 판단하는 자연법

 

따라서 윤리적 행위를 위해서는 주관적인 기준인 의도의 선함만이 아니라 선한 대상을 식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필요하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를 인간 자신의 목적으로 이끄는 역할은 이성의 일이므로, 인간 행위의 규칙과 기준은 이성이다(I-II,90,1). 더 나아가 사변적 학문의 영역에 이성의 제일 원리인 모순율(“동시에 긍정과 부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 있는 것처럼, 도덕의 영역에는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라.”라는 윤리의 제일 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I-II,94,2).

 

극히 단순해 보이는 이 원리에서 제시된 객관적인 선이 무엇인지를 아퀴나스는 자연법(lex naturalis) 사상 안에서 찾는다. 이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그리고 특히 아우구스티노는 ‘자연적인 윤리 법칙’이라는 사상과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아퀴나스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연적 이성의 빛은 우리 안에 각인된 신적인 빛인 자연법의 한 기능이라고 말한다(I-II,91,2). 이를테면 만일 인간이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창조주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믿는다면, 노예 제도는 비자연적인 행위로 간주하여야 한다. 주인도 노예도 똑같이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본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도덕률이 이성에 의해서 언명되고 명령받는 경우 인간의 본성 자체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자연법’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자연법과 그 일반 원리들은 만인에게 같다. 그런데 직관적으로 아는 자연법의 제일 원리를 특수한 경우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가끔 잘못할 수가 있다. 경우에 따라 그는 도덕적 판단의 오류에 대해 책임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I-II,94,4).

 

인간 생활에 편리한 규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직접 자연법에 속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떤 유용한 것을 덧붙이거나 더는 실행되지 않은 어떤 규정을 대체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변화가 자연법에 속한 무엇의 제거를 의미한다면, 자연법은 변화될 수 없다(I-II,94,5). 따라서 자연법 자체가 변화된다기보다는 오히려 행위의 상황이 이제는 그 법이 해당하지 않을 만큼 변화할 수 있다.

 

 

인정법-자연법-영원법의 관계

 

아퀴나스는 공통의 원리를 제시하는 자연법 이외에 이 원리가 개별적 성품에 적용되는 ‘인정법’(人定法)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I-II,91,3). 인간은 덕으로의 경향성을 지니지만, 그 완성은 오직 훈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더불어, 보통 혼자서는 좀처럼 덕을 닦는 길로 나아가기 어렵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덕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인정법은 유용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I-II,95,1).

 

또한 ‘공동선’을 위한 인정법은 모든 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정법은 일반적인 인간들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장 중대한 악습만을 금지해야 한다. 인정법을 지나치게 세밀하고 엄격하게 제정하게 되면, 솔로몬의 말대로 백성들의 피를 말리고 진을 빼고 만다(I-II,96,2). 그런데 ‘악법도 법이다.’라는 널리 퍼진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아퀴나스에 따르면 자연법에 어긋나는 인정법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이성에 의해서 반포된 자연법은 어떠한 초월적인 근거로 지니고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답변은 모든 인간이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연법도 그 뿌리를 신적인 영원법에 두고 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신 안에 있는 예지가 영원법을 구성하며, 이것이 자연법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신은 영원하고 신이 지니는 인간의 이데아도 영원하므로, 이 영원법의 반포는 비록 ‘피조물의 처지에서는’ 영원하지 않을지라도 ‘신의 처지에서는’ 영원한 것이다(I-II,9,1; 93,1).

 

자연법이나 영원법이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이라는 주장을 피하고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원법이 본디 신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범형적인 이데아를 생각하는 신의 지성에 근거함을 밝혔다. 나아가 사실상 사람은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적으로 규정되고, 그 지복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한도를 넘어서므로 자연법과 인정법 말고도 신의 힘으로 주어진 영원법에 의해 궁극 목적으로 인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퀴나스가 도덕의 객관적인 기준으로서 ‘자연법’을 강조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인간의 자율성을 위협한다고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주관적 기준인 ‘선한 의도’를 강조했던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한 사람의 진정한 의도는 그 자신과 신만이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인이라면 중요한 결정을 타인에게 고스란히 미루어서는 안 된다. 객관적인 기준에 대한 충고는 받을지라도 자신의 의도에 대해서 충실히 성찰한 가운데 스스로 행위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아퀴나스가 자주 강조한 바오 같이 ‘인간은 자기 행위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기준 모두를 충족시키는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앞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4월호, 박승찬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