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코어 “거대함은 모든 사회적 불행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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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12-12 10:22수정 :2020-12-12 13:24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33) 레오폴트 코어(1909~1994년)
자유로운 시민들이 국가 지배 벗어날
‘인간적 규모’의 소도시 사회를 추구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영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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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한 밤’은 잘츠부르크 근처 인구 3천명도 안 되는 작디작고 너무나 조용한 마을인 오베른도르프에서 만들어져 처음으로 불렸다. 그러니 대도시의 거대한 상가나 건물은 물론, 성당이나 교회라고 해도 세계 최대라는 식의 대형 건물에서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것은 그 노래를 만든 사람들에게 결례를 범하는 짓이다.
그 마을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원형으로, 1909년 그곳에서 태어난 레오폴트 코어로 하여금 현대문명의 거대함과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작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게 된 것과 직결된다. 마찬가지로 그 캐럴도 작고 조용한 밤, 가난하고 소박한 밤을 찬양하는 것이니 부자들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그런 곳에서 그것을 부르는 것도 그 노래를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독하는 짓이다.
오베른도르프 같은 작은 계곡들이 모두 각각의 지역적 개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곳 사람들에게는 좋은 삶인 반면, 천편일률적이고 기계적이며 도식적인 도시 생활은 타락한 삶으로 경원된다. 계곡의 작은 마을에는 공장이 아니라 목장, 자가용이 아니라 자전거, 아니 걷기가 알맞다. 모차르트가 위대한 조화의 음악을 창조한 것도 작은 도시인 잘츠부르크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코어는 생각했다.
코어는 고향에서 자란 뒤 부근의 인스브루크대학교에서 법학, 빈대학교에서 정치학, 런던경제대학원에서 경제학과 정치이론을 공부하면서 어떤 조직과도 무관한 독립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어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1937년에는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면서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의 친구가 되었다. 파시즘과의 싸움이었기에 스페인 내전에 세계 정의를 위해 기꺼이 참전했지만, 코어에게는 카탈루냐와 아라곤의 분리주의 지역과 알코이와 카스페의 작은 아나키즘 도시들의 제한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자치 실험이 더욱 감명 깊었다.
아무리 커도 인구 10만명 정도의 대학도시인 잘츠부르크나 인스브루크를 비롯한 소도시 정도가 사람이 사는 ‘인간적 규모’로 적합하고, 그 도시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국가 지배를 벗어나 자치하며 주위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그의 이상사회는 스페인 내전을 경험하면서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따라서 1938년 오스트리아를 나치가 침략해 합병한 것은 그의 이상을 송두리째 파괴한 것이었고, 어쩔 수 없이 이민을 간 미국도 그에게는 맞지 않았다.
“작은 나라가 더 행복하고 평화로워”
1943년부터 뉴저지주의 럿거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쳤지만 거대함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 학계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1941년에 발표한 최초의 논문인 ‘이제는 불통일: 소규모 자치 단위를 기반으로 한 사회를 위한 요청’에서 유럽을 수백개의 도시국가로 분할할 것을 요구했는데 정치와 군사의 거대주의에 젖은 미국에서 먹힐 리 없었다. 같은 논리라면 미국도 50개 이상의 나라로 분리되어야 했다.
특히 1950년대 매카시즘 시절에는 미국 정부의 의심도 받았다.그래서 1955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의 해외 영토인 푸에르토리코 대학교에서 경제학 및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마을 재생과 친환경적 교통수단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같은 취지의 첫 저서인 <국가의 붕괴>도 미국과 영국 출판사들에 여러 차례 거부된 뒤 옥스퍼드대학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허버트 리드의 추천으로 1957년 영국에서 겨우 출판되었다.(이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똑같은 사연이다.) 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형태의 사회적 불행 뒤에는 오직 거대함이라는 한 가지 원인이 있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만약 우리가 거대함, 즉 지나치게 큰 것이 단지 사회적 문제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생각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창조물에 스며드는 유일한 문제다. 뭔가 잘못될 때마다 너무 큰 것이다. … 그리고 한 국민의 몸이 공격성, 잔인성, 집단주의, 또는 거대한 어리석음의 열병으로 병들게 된다면 그것은 나쁜 지도력이나 정신 착란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탓이 아니라, 매력적인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과잉 집중된 사회 단위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레오폴트 코어(오른쪽)와 영국의 교육가이자 뉴에이지 운동의 창시자인 조지 트리벨리언. 1990년. 바른생활재단 누리집
코어는 역사를 통틀어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평화롭고, 더 창조적이고, 더 번영했음을 보여줬다. 세계의 주요 국가들이 그것들이 비롯된 작은 나라들로 다시 해체된다면 실제로 우리의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본 그는 갈수록 점점 커지는 정치 단위를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작은 규모의 단위가 평화와 안보를 가져다준다는 믿음에서 지도자들이 시민들에게 접근하고 호응하는 작고 상대적으로 힘없는 국가의 구성으로 돌아가 권력 집단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빈곤국에 대한 대규모 대외 원조가 지역 이니셔티브와 참여를 억압한다고 비판하고, 도리어 중앙집권적인 정치경제구조를 해체하고 지역통제에 유리한 정치경제구조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하나의 나라 안에서도 “건강한 대도시는 도시의 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건강한 도시는 광장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물리적 및 정치적 세분화의 중요성을 설명했다.그런 도시의 모델로 찾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한 그의 낭만적인 열정은 르네상스 군주의 계몽적 후원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점에서 보수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는 언제나 민주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였지만, 대중사회와 20세기 중반의 산업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우리 시대의 중심 질병은 추악함, 가난, 범죄 또는 방치가 아니라 현대국가 및 도시 거대주의의 비견할 수 없는 차원에서 오는 추악함, 빈곤, 범죄, 방임이다”라고 했다.
대안 노벨상인 ‘바른생활상’ 수상
만년의 코어는 영국의 웨일스로 이주하여 1977년까지 웨일스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면서 공동체에 입각한 웨일스 독립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1983년 스톡홀름에서 ‘인간적 규모를 위한 운동의 초기 영감’을 준 공로로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정의와 진실, 평화 증진을 위한 활동을 벌인 개척자에게 주는 상으로, 대안 노벨상으로도 불림)을 받았다.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즐긴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이반 일리치, 웨일스에서는 에른스트 슈마허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의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슈마허의 베스트셀러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코어의 핵심 원칙 중 하나에서 제목을 딴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어의 사상은 커크패트릭 세일의 <인간적 규모>(1980)와 <대지의 거주자들: 생태지역적 비전>(1985)에도 영감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코어는 매력적인 대화주의자이자 재치 있게 대중적 속설을 비판하는 자로 묘사되었다. 고전적 학습과 유럽 문화에 몰두한 코어는 동시에 20세기 후반에 가장 심오한 독창성과 혁신성을 가진 정신의 하나로 녹색사상, 생태지역주의, 제4세계, 분권주의, 아나키즘 운동 등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1994년 죽은 뒤 그의 유해는 오베른도르프의 푸른 계곡으로 돌아갔다. 가족의 해체까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코어는 평생 단 한번도 폭넓은 명성과 인정을 누리지 못했으나 그의 생각은 현대 어떤 유행 사상보다 수십년 앞서 있었다. 그의 친구 중 한명이 그가 죽은 후 말했다. “이제 그의 시대다!” 아니다. 어쩌면 코로나19 이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너무 크면 언제 어디서나 잘못된다. 너무 크면 아름답지도, 올바르지도, 참되지도 않다. 작아야 진선미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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