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2021-08-29 [제3259호, 12면]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7) 팬데믹 시대의 삶
오늘날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무얼 말하고 있나
코로나19는 건강과 생존에 심각한 혼돈 야기하는 중 만남과 이동 자유 제한되고 자본 양극화·불평등 더 심화
디지털에 의한 통제와 감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추세
종교, 신앙생활 피해만 언급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시대적 전망 제시 부족해
더 능동적·구체적 방식으로 미래 비전 보여줄 수 있어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신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팬데믹 시대에 교회는 신자들이 신앙적 삶의 방식과 자세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코로나 시절이 여전하다. 끝이 보이는 줄 알았는데, 다시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막막함과 무의식적 불안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사람들은 일상의 규제와 거리두기에 지쳐간다. 무감각, 자포자기, 무기력, 괜한 짜증이 늘어간다. 그래도 삶은 지속되고 사람들은 견뎌내겠지만, 미래적 전망의 불확실성은 집단적 우울증과 사회적 신경쇠약으로 전이되고 있다.
■ 팬데믹 시대의 풍경 – 보건, 경제, 일상적 삶의 위기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은 삶의 전방위 영역에서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보건과 경제의 영역에서 도전을 제기한다. 이승의 삶을 살면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두 가지다. 건강과 돈. 누구나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 자본을 통해 인정 욕망을 실현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싶어 한다. 보건과 경제는 건강과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고 재구성하는 핵심 영역이다. 팬데믹은 이 핵심 영역에 심각한 혼돈을 야기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건강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팬데믹 유행의 초기 단계에서 많은 사망자의 발생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야기했다. 봉쇄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제약을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감염에 대한 공포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과거의 전염병보다는 치명적 위험이 덜 하다는 인식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감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초래한 경제적 혼돈에 관심의 무게가 옮겨 가는 경향이다.
코로나 사태는 경제활동을 위축시켰다. 국경의 봉쇄와 이동의 제한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경제 침체에 대한 두려움은 수천 명의 사망자가 나오더라도 자유주의 시장 경제활동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트럼프식 주장을 낳기도 했다. 대면과 접촉을 통한 경제 행위에 생계를 걸고 있는 자영업자들은 코로나 사태에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 팬데믹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하는 한계와 모순을 더욱 분명하게 노정(露呈)시켰다.
자본의 양극화와 불평등 현상은 코로나 시기에 더욱 심각한 폐해를 낳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었다. 기술과 자본을 선점한 선진국의 백신 독점은 가난한 국가의 보건과 경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약소국의 보건과 경제의 붕괴는 국제적 농작물 조달을 위태롭게 하고 원자재 가격 상승이라는 악순환으로 돌아온다. 또한, 경제적 불확실성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 공격적 차별주의와 감정적 포퓰리즘의 만연은 팬데믹 시대가 낳은 정치적 풍경이다.
팬데믹은 일상적 삶의 위기를 초래했다. 사람들 간의 자유로운 접촉과 만남,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물리적 근접성과 정서적 친밀성의 균형에 기초하는 공동체적 삶이 위기에 처했다. 물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이미 사람들은 사회적 고립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네트워크적 연결망에 과도하게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러한 추세를 강화했다. 육체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의존적인, 팬데믹 시대의 일상적 삶은 그 균형점을 잃어버렸다. “지금 우리에게는 타인과의 더 많은 물리적 근접성뿐 아니라 타인과의 더 많은 심리적 거리도 필요하다.”(슬라보예 지젝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감시와 통제
팬데믹 상황에서 디지털 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했다. 스마트폰을 통해 코로나 확진자 상황과 위험지역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디지털의 편리함은 감시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이미 “감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쇼샤나 주보프) 공중 보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국가의 통제와 감시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팬데믹은 개별적이고 자유로웠던 인간을 그저 하나의 통계 데이터로 전락시키는 과정을 가속화 한다. 지금의 편리함과 자유는 미래의 통제와 감시를 담보로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르조 아감벤은 음울한 전망을 내린다. “새로운 레짐(regime)은 인간관계를 극도로 약화시킬 것이며, 전례 없는 사회적 통제를 활용하는 가장 잔혹한 국가주의적 공산주의와 가장 비인간적인 자본주의가 합쳐지리라는 것이다.”(「얼굴 없는 인간」)
■ 지구 안에서의 삶
벌써 일 년 반의 시간을 코로나 시절로 보내고 있다. 가끔은 아득하다. 코로나 이전의 삶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브뤼노 라투르가 우화적으로 표현했듯이, 코로나 시대의 사람들은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같은 느낌이다.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살 수 없다. 마스크는 변신의 상징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주로, 하늘나라로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지구에 격리되어 있으며 지구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해방된다는 것은 지구로부터 탈출이 아니며, 옛 방식의 삶으로 복귀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지구 안에서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 새로운 변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전의 삶이 지구를 점령하고 폭력으로 지구를 탈취하고 적출하는 삶이었다면, 변신 이후의 삶은 지구를 수선하고 새롭게 재창조하는 삶이어야 한다. “이제 문제의 핵심은 위와 아래 또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아닌, 땅 위의 삶과 지구와 함께 하는 삶 사이의 긴장이라고 할까?”(브뤼노 라투르 「나는 어디에 있는가」)
■ 팬데믹 시대 신앙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벼랑 앞에/ 한줄의 시로 부끄럽게 엎드린 마음이/ 오늘이라면/ 내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전히 합니다.// 지금도 태어나는 인간의 아이들이 있고/ 자라나는 어린 인간들이 있는데/ 절망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어디서부터 흔들려야 할까요?/ 세계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저지르며 살아온 어른 인간들이/ 부끄러움에 관해 생각하는 마음의 저녁,/ 거기부터일까요?”(김선우의 시 「마스크에 쓴 시 13」)
팬데믹 시대에 종교인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팬데믹이 종교와 신앙의 현실에 끼친 피해에 대해서만 소리 높여 말한다. 세속의 학자들은 팬데믹에 대해, 거시적 또는 미시적 관점에서, 철학적이고 인문적 사유를 시도하고 있다.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지, 인간 생명과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택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신학은 시대적 전망의 힘과 질문하는 능력을 상실했는가? 프란치스코 교황 혼자서만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오늘의 종교와 신학이 비록 거시적 차원의 전망과 성찰은 제공하지 못한다 해도,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방식과 자세에 관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팬데믹 시대의 신앙적 삶과 자세에 대해 좀 더 능동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선포하고 실천하기를 희망한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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