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0)사람과 책의 경계가 옅어지는 순간 - 읽기의 미학
읽기란 글 쓴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룩한 의식
읽기는 교감이자 연대이며
타인을 공감하고 돌보는 일
사람 읽는 건 그를 인정하고
그와 교감하면서 돌보는 것
발행일2022-03-13 [제3285호, 14면]
■시 읽기에서 꼬리를 무는 생각들
습관적으로 시집을 산다. 시골에 살다 보니 서점에서 읽어보고 살 수 없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새로 나온 시집들에 대한 소개문과 간략한 내용을 보고 구입한다. 신문 문화면의 책 소개도 시집 구입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새 시집이 나오면 어김없이 산다.
책을 샀다고 해서 그 즉시 바로 다 읽는 것은 아니다. 책상에 쌓아두게 된다. 정독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책들은 목차와 머리말과 일부 내용을 발췌해서 읽고 바로 책장으로 보내진다. 논문이나 글을 쓸 때 참조용 책들이다. 문학책들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물론 설렁설렁 읽지만 말이다. 젊은 날에는 평론과 소설을 많이 읽었다. 우리 젊은 시절에는 문학 평론가들이 당대의 지식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문학평론을 통해 지적 갈증을 채웠다. 하지만 이제 다양한 영역의 지식인들이 활동하는 시대다. 신형철처럼 탁월한 지적 역량을 보여주는 문학 평론가들이 있지만, 어느 시점부터 문학평론을 거의 읽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이젠 소설도 잘 읽지 않는다. 이성우, 김연수, 은희경, 황정은의 소설들만 듬성듬성 읽는다. 그래도 여전히 시집은 읽는다. 시집은 짧기에 그리 많은 시간의 품을 팔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집을 소설처럼 읽는다. 책상에 쌓아둔 시집들을 자주 숙제하듯이 읽는다. 시를 좋아하지만 불량하고 불경한 독자인 셈이다. 시를 낭독하는 즐거움, 암송하는 기쁨을 잘 모른다. 그저 시에서 사람들의 무의식과 미세한 감정의 숨결과 삶의 비의를 엿보려는 이기적인 애독자다. 가끔은 자신에게 변명한다. 내가 늙어서 감정과 정서가 건조해져서 그렇다고, 너무 많이 읽어서 오히려 긴장감을 잃어버려서라고, 요즘 젊은 시인들의 감성과 인식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확 다가오는 시들을 발견할 때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최근에 읽은 두 개의 시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이동욱 시인의 시,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내가 쓴 한 문장을 네가 읽으면 두 문장이 된다.” “내가 읽은 문장이 네가 들으면 한 문장이 되지 않아도/ 우리를 주어로 삼으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말이다.” 이종민 시인의 시, ‘우리가 문장이라면’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두 시의 화두와 구절들이 오래 머리를 맴돌았다.
■ 읽기, 이해, 인정
사람을 읽는다. 글을 읽는다.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것과 책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사람과 삶을 읽는 것과,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과 몸짓과 표정을 통해 그와 그의 삶을 읽는 일은 적어도 나에게는 시작점과 지향점이 같다. 둘 다 사람과 삶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사람과 삶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사람이라는 책에서 말과 행동은 글의 이야기 같고, 몸짓과 표정은 문장처럼 여겨진다.
사람과 책의 경계가 옅어지고 흐릿해지는 순간을 자주 경험한다. 나에게, 책 제목과 표지는 자신을 발견해달라는 요청의 신호이며, 문장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암호이자 기표다. 시인 진은영과 상담가 김경희는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에서 “문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활동”과 “문학과 만나서 스스로 변화하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시도다. 책을 통해 자신을 읽고, 타인을 읽고, 마음을 읽고, 삶을 읽는다. 어쩌면 읽기란 존재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포괄적인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일만큼 아름다운 행위가 또 어디 있을까. 책을 펼쳐 본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 책을 쓴 사람의 운명을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읽어주지 않은 삶은 서럽고 서글프다.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일은 말한 사람과 글 쓴 사람의 정체성과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룩한 의식(儀式)이다.
■ 읽기, 만남, 돌봄
도서관과 서점과 책장의 책들은 사람과 삶이라는 우주의 신비를 발견해달라고 보내오는 미지의 신호다. 책을 꺼내어 읽는 일은 ‘미지와의 조우’다. 읽기는 만남이며 대화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세계에서 미동도 않은 채 타인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 읽기는 공감이며 “타인의 관점으로 옮겨가기”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내면의 손님으로 맞는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타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더욱 확장되고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감정적으로도 바뀌어 있다.”(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읽기는 교감이며 연대다. 읽기는 타인과 공감하는 일이며 나아가 타인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읽기와 돌봄을 연결하는 것은 너무 많이 나간 주장인가? 현대는 주체성의 시대라기보다는 타자성의 시대다. 개체성과 자율성보다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을 더 강조하는 시대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고 관계적 존재다. 이기적이고 개별적인 주체들은 계약을 통해 협력하고 살아간다. 계약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계약이 올바르게 수행되는가에 있다. 즉, ‘공정’과 ‘정의’가 중요한 미덕이 된다. 하지만 공정만으로 유지되는 계약사회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쉽게 목격한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을 통해서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존한다. 관계성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 덕목은 ‘연대’와 ‘돌봄’이다.
사목(pastoral care), 사회 복지(social care), 보편적 돌봄(universal care). 모두 돌봄을 매개로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신자들을 돌보는 일,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향한 마음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일”(김정희원 교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목의 지평은 세상을 향해, 자연과 우주를 향해 확장되어야 한다. 통합 생태론과 생태적 “신념, 태도, 생활 양식”을 강조하는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이 돌봄의 확장성을 먼저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읽는 일은 그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이며, 그와 교감하고 그를 돌보는 일이다.
(시 두 편을 읽고 생각이 뜬금없이 너무 멀리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읽기의 매력 아닐까?)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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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고나서 많은것을 가져다 준다 시 두편을 읽고도 저렇게 풍부한 감성을 가지다니
아무것도 아닌 나는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른다
음악을 좋아해서 자구 음악방에 들어가서 듣는데 어느 음악실은 음악도 좋지만 거기에 다는 댓글들이 더 시적이다
단순히 와 주셔셔 반갑다는 말이 아닌 그것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그말들 때문에도 음악을 듣는다
듣다보니 나도 덩달아서 조금씩 닮아가 섣부른 글을 쓰기도~~
책이나 시나 가까히 두고 자주 열어보아야 할것 같다 (블,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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