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2)공부, 성찰, 일상의 수행
변화와 쇄신 위한 노력들이 세상과 교회를 바꾼다
일상 삶의 모든 곳이 수행 장소
하는 일에 마음 싣고 지향 두며
신앙적 관점에서 온 힘 다해야
발행일2022-04-10 [제3289호, 14면]
■ 개인의 변화와 성숙
늙어가면서 뼈저리게 절감한다. 삶의 연륜이 깊어간다고 자동으로 인격이 성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다고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잘 늙는 일이 힘든 만큼, 신앙의 깊이와 성숙을 위해서도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삶의 영역이나 신앙의 영역이나 일종의 지불비용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으랴.
사제로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았다. 거의 매일 미사를 한다. 성체성사의 은총을 매일 충만히 받는다. 하지만 내 신앙과 인격이 성품성사를 받고 초보 신부로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나아지고 깊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빛나던 그 시절의 순수한 열정과 신앙이 이젠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는 것일까. 신학적으로 보면, 구원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성취와 인격적 성숙은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구원은 은총과 신앙 안에서 선물로서 주어진다. 구원과 은총이라는 차원에서 성사의 사효성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와 성숙은 성사의 인효성 영역에 더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정성과 마음의 집중 없이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성사 거행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다.
지난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던 감상이 있다. 국가의 수준과 품격은 시민의 수준과 품격과 같이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민의 모습과 수준이 국가의 모습이며 수준이다. 탁월한 정치 지도자가, 어떤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국가의 모습과 수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시민의 전체적 역량이 강화되지 않는 한, 국가의 진정한 변화와 품격의 향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앙인들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다. 신앙인들 스스로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진정한 변화와 쇄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누군가가 선도적으로 변화와 쇄신을 주도해주기를 갈망한다. 물론 때때로 전위적 선구자들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고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전반적인 모습과 수준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변화와 쇄신의 움직임은 금방 동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세상과 교회의 역사 안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공동체의 변화와 쇄신은 그 구성원들의 변화와 쇄신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개인의 변화와 쇄신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흐르는 세월은 그저 타성과 관성만을 낳는다. 무엇이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의 변화를 위해 개별적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 공부와 사람의 성숙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만이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고 쇄신된다. 물론 지적 권력을 쌓아 인정 욕망을 채우고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공부도 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늘 열린 자세와 겸손한 태도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만이 그래도 조금 변화되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공부하고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을 대상에 투사만 할 뿐이다. 대상과 관점의 상호작용에 따른 역동성을 놓친다. 언제나 같은 입장과 견해만 반복할 뿐이다.
공부란 타인의 생각과 경험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좋은 공부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것이 공부다. 세상의 삶과 신앙의 삶에 대해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는 것이 참 공부다. 좋은 공부는 새로운 상상을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기존의 방식에 대해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공부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만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고 성숙해질 수 있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변화의 기미는 공부에서 시작된다.
■ 자기성찰과 쇄신
공부와 성찰은 경계가 애매하다. 생각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공부와 성찰은 닮아있다. 성찰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다는 데 그 방점이 있다. 성찰은 곧 자기성찰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찰의 진정한 의미는 타자 성찰, 즉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때로 타자의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사회의 구조적 악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성찰이라는 말보다는 비판의식과 비판적 사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성찰은 먼저 자기를 돌아보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자기성찰만이 변화와 쇄신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 일상의 수행
일상 삶의 모든 자리가 수행의 장소다. 수행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 자리,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수련과 수행의 장소다. 우선, 일상의 수행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드러난다. 운명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응대하는 방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것이 수행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시선과 자세로 응대하는 일이 수련이며 수행이다. 둘째, 일상의 수행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마음을 싣고 지향을 두는 일이다.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의 목적을 상기하고 기억하면서, 그 일에 건강한 신앙적 지향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음을 집중하고 정성을 들이면서 그 일을 수행한다면 그것이 곧 수련이다. 셋째, 일상의 수행은 연극적 수행의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연극적 수행이란 하느님이 감독이며 제작자이고 우리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모든 것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삶의 무대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온 힘을 다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연극적 수행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응대 방식, 하는 일들에 대한 목적과 지향과 정성을 싣는 일, 연극적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되고 쇄신될 것이다. 공부와 성찰과 일상적 수행만이 우리를 성숙하게 할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변화와 쇄신이 공부와 성찰과 일상의 수행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축소 환원일까. 변화와 쇄신을 위한 효과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변해야 교회와 세상이 변한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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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만이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고 쇄신된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것들에 대한 신앙의 시선과 자세로 응대하는것이 수련이며 수행이라고 말한다
연극적 수행도 덧붙힌다 하느님은 감독이며 제작자이고 우리는 연극무대의 공연자들이다 공연자들은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고 이도저도 아닌 그냥 한줄 지나가는 역할도 있을것이며 금방 나왔다 사라지는 역할도 있을것이며
그러나 감독의 입장에선 어는것하나 빠져서는 안되는 역할들이다 조연이 잘해야 주연이 산다는 말도 있다
누구도 가끔 누어서 나는 세상에 어떤 역할로 살라고 나왔는지 지금껏 사유하지만 가만보니 그저 한갓 지나가는 저 건너편에 있는 신호등에 따라 그냥 건너는 역할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역할마저 힘들때가 많다
처음부터 좋고 편한 역할을 맡은 사람도 있고 죽을때까지 노비역할만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것을 보고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한다 어차피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자기가 주어진 역할만 잘해도 감독자는 그를 감사히 좋게 평가 할지도 모른다(블.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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