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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의 쫌아는 언니] 내 옆에 조금은 다르게 서고 싶은 친구에게

[안은영의 쫌아는 언니] 내 옆에 조금은 다르게 서고 싶은 친구에게

(서울=뉴스1) 안은영 작가 | 2022.02.09 18:03:00 송고

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꿈새김판이 '겨울은 길었지만 결국, 봄은 옵니다'라는 문구로 새단장 돼 있다.  2022.2.7/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코로나19로 삶은 지루해지고 바이러스 감염 이슈 외엔 긴장감도 낮아졌다. 손뼉 치고 어깨를 부딪쳐야 흥이 돋는 나라는 사람은 메타 유니버스를 축으로 변방에서 회전하는 작은 운석 같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더 근시안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자괴감 속에 근래 자주 허를 찔리고 있다.

가령 새해 들어 일곱 살을 먹은 조카는 며칠 전 '고모는 왜 결혼하지 않아요?'라고 내게 물었다. 연애의 분분한 환희와 괴로움을 알 리 없는 유치원생이 내게 이렇게 물었을 때는 한 가지 이유뿐이다. 고모를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처지에 놓고 비교했기 때문이다. 왜 고모는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마다 혼자 와서 할머니에게 혼만 나고 가는가, 왜 고모에게는 엄마나 큰고모 같은 기혼자의 카리스마가 결여돼있는가, 언젠가 고모가 남자를 달고 와 나의 새뱃돈 통장을 불려줄 가능성은 영영 없는 것인가.

이미 어엿한 중년의 세계에 돌입해 있다. 덕담으로라도 이런 질문을 받기에는 슬슬 민망해지는 나이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궁금한 만 육세 조카에게는 친하게 지내는 성인 여자가족의 신상이 자못 궁금하기도 했겠다. 조카의 기습질문에 웃다말고 생각했다. 그 많은 남자들, 은하수처럼 쏟아지던 무수한 가능성은 다 어디로 갔지?

친하게 지내는 성인남자친구 즉 남사친의 질문에도 멈칫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다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야?' 이 질문은 마치 '숙주 좀 더 달랠까?'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들려서 '난 충분해'라고 대답할 뻔 했다. 젓가락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리는 걸 보니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한 뒤에 대답했다, 너는 생각하는 사람이지. 그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여서 설명을 보태주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가 듣고 싶어 한 말은 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내 대답은 성의없이 들렸을지도 모르겠다(지금 생각해보니 필경 그랬을 것 같다). 오래된 사이가 좋은 것은 어지간한 상황들이 납득된다는 거다. 축적된 경험 속에서 안전한 길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나마나한 대답을 듣고도 상대에게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예의바름도 우리가 모색한 친구관계의 룰 중 하나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 관계가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어쩌면 조카의 질문 속에서 내가 찾은 유머는 '너에게 결혼하지 않은 고모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라는 것이고 내 옆에 조금은 다르게 서고 싶은 친구에게는 '그럼 나도 한 번 생각해볼께'라고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수한 변수 속에 오직 한 번의 선택지들로 이어진다. 둘도 아니고 겨우 하나의 선택만이 우리를 다음 단계로 데려간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은 당시엔 단단하지 않았다. 갈등하고 모른 척 하고 눙치고 회피하면서 가까스로 선택해왔다. 우리는 49퍼센트의 위험성과 51퍼센트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매 순간 허를 찔리며 살아간다. 그것을 사람들은 '인생'이라고 부른다. 

 

안은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