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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정치

[사설] 심석희의 고통과 용기, ‘정의로운’ 응답이 필요하다

한겨레 사설, 칼럼(등록 :2019-01-09 17:44수정 :2019-01-09 19:05)

[사설] 심석희의 고통과 용기, ‘정의로운’ 응답이 필요하다

 

충격이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가 심석희 선수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가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정부는 9일 대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스스로 밝혔듯, “그간 정부가 마련한 모든 제도와 대책이 사실상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은 자명하다. “더이상 체육계에 이런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며” 용기를 낸 심 선수 앞에 우리 사회의 ‘정의로운’ 응답이 필요하다.


심 선수의 법률 대리인인 세종은 8일 저녁, 선수 4명에 대한 상습폭행 혐의로 실형을 살고 있는 조재범 전 코치가 심 선수를 만 17살 시절부터 수차례 성폭행했다며 그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고 밝혔다. 조 전 코치 쪽은 혐의를 부인하지만, 심 선수가 자칫 2차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을 굳이 꺼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발탁해 키운 선수에게 저지른 명백한 ‘위력에 의한 성폭력’ 범죄 자체도 가증스럽지만, 그런 범죄가 태릉 및 진천 선수촌 빙상장 탈의실 등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설에서 주요 대회를 전후해 일어났다는 주장 또한 충격적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위력에 의한 성폭력 범죄를 드러낸 이번 사건은 국가 주도 엘리트체육 시스템 및 폐쇄적인 체육계 문화라는 ‘특수성’도 간과할 수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엘리트체육을 하는 선수가 대부분인 국내에선 지도자의 눈 밖에 나면 선수생활이 어렵다. 용기를 내 폭로하더라도 징계 주체가 체육단체인 탓에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대한체육회와 빙상연맹의 1차적 책임이 큰 이유다. 바로 전날 대한체육회가 발표한 스포츠계 폭력 실태조사에선 성폭력 경험 비율이 1.7%라고 나왔지만 제대로 된 조사로 믿기 어렵다. 

 

정부는 이날 체육계 성폭력 처벌을 강화하고, 국내외 체육 관련 단체 종사나 국외 취업 기회를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인권 전문가를 참여시켜 규정을 정비하고 민간 주도 전수조사, 합숙훈련 개선, 피해자 지원 보호 강화 같은 방안도 내놨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관계자들에 대해 책임을 엄중히 묻는 것과 동시에 엘리트선수 육성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가해자에 대한 엄한 사법적 판단과 함께 잠자고 있는 #미투 관련 법안에 대한 국회의 대응도 시급하다. 지난달 17일 조 전 코치의 재판에 나온 심 선수는 “그와 마주친다는 두려움에 법정에 설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진실을 밝히고 그가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힘겹게 출석했다”고 말했다. 2014년 소치올림픽 여자 3000m 계주에서 반 바퀴를 남기고 역전하던 심 선수의 모습, 2018년 평창 개인전의 아픔을 딛고 계주에서 동료들과 금메달을 일구던 투혼을 온 국민은 기억하고 있다. 오늘 그의 용기도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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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877688.html#csidx134fc2224477a74ad8b342ddbe027d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