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9.10.23. 오전 8:00 기사원문 스크랩
<하재근의 이슈분석> 조커에 열광하는 병든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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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내용 있음) ‘조커’는 오락영화가 아니다. 이렇다 할 액션 장면도 없다. 음울한 드라마로 예술영화의 성격까지 있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으니 흥행성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예술 영화제 수상작을 호환마마보다 꺼려하던 관객들이 ‘조커’에 열광한 것이다. 한 포털에서 전문가 평점이 7.5인데 관객 평점이 9점 넘게 나왔다. 보통 영화제 수상작이 전문가 평점이 높은 반면 관객 평점은 낮은 법인데, ‘조커’는 정반대의 이변이 나타났다. 관객평점만 보면 히어로 액션 영화로 착각할 법하다.
흥행 성적도 450만 관객을 돌파해 저 유명한 흥행작 ‘다크 나이트’의 417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다크 나이트’는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로 조커라는 캐릭터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바로 그 영화였다. 히스 레저를 뛰어 넘는 조커는 없을 거라고 했는데 이번 영화 ‘조커’가 11년 만에 히스 레저를 넘어섰다.
해외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 주말까지 세계 흥행 수익 7억3천750만 달러(8천643억 원)를 기록했다. 역대 R등급 최대 흥행작인 ‘데드풀’의 7억8천300만 달러 기록을 위협한다. 미국에선 ‘데드풀’ 기록 경신은 당연하고 최대 9억 달러(1조548억 원)까지 세계 흥행 수익 기록을 세울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데드풀’은 유명한 히어로 액션영화인데도 음울한 드라마 ‘조커’에게 압도당하고 있다.
확실히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영화의 재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신드롬이다. 이 영화의 무엇인가가 우리 시대 관객의 마음과 공명했다. 사회현상이고 그래서 사회적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미국에선 모방 범죄를 우려해 ‘조커’ 상영관 인근에 경찰 경계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남부 일부 극장가에선 총기 위협 첩보로 극장이 폐쇄됐다.
이 영화는 조커가 왜 조커가 됐는지를 그린다. 한 인간이 어떻게 괴물 악당이 됐는지를 그리는 것이다. 선천적 사이코패스 같은 유전적 요인이 아닌 후천적 요인, 즉 사회환경 때문에 조커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다.
조커가 사는 고담시는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약자 멸시로 병들어간다. 약자를 보살피는 행정정책은 극히 미비한데 설상가상으로 복지예산까지 줄어든다. 그 결과 아무 때나 웃음을 터뜨리는 정신질환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빈곤층 아서 플렉은, 그나마 받던 정신상담 및 처방 서비스마저 받지 못하게 된다.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다.
고담시는 타자를 경원시하고 약자를 멸시하는 문화가 심각해 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됐다. 이때 부자 정치지도자는 약자들을 구제할 사회안전망 확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기 때문에 약자가 됐다며 조롱하고 열심히 일해 이룩한 부를 과시한다. 점점 더 흉흉해지는 사회에 기본적인 공공 시스템 관리조차 무너진다. 지하철 등이 우범지대로 방치되는 것이다.
이 속에서 금융 화이트칼라들에게 공격당하던 아서 플렉는 지하철에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여기에 약자들이, 부자가 당했다며 열광한다. 고무된 아서 플렉은 생방송 TV쇼에 출연해, 자신을 조롱하던 스타 MC를 살해한다. 이에 자극 받아 고담시에 폭동이 일어나 무정부상태가 되고 아서 플렉은 마침내 폭동세력의 영웅 조커로 거듭난다.
결국, 멸시 받던 사회부적응자가 그 분노를 폭발시켜 사회를 파괴하는 조커가 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내에서도 호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만큼 분노가 쌓이고 소외된, 루저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영화는 마치 1980년대 뉴욕 같은 느낌이다. 당시는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빈부격차가 치솟던 시점이다. 복지예산 삭감으로 사회안전망도 축소됐다. 그 이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2008년 이후 금융위기와 함께 자본주의 위기론까지 나왔고 세계 곳곳에서 폭동이 터졌다. 영화 속 폭동은 그 양극화의 폭동을 떠올리게 한다.
이후 경기가 나아지면서 상황이 안정되긴 했지만 양극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된 건 아니다. 총량적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성장의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들은 소외감을 키워왔다. 특히 젊은이들은 미래 희망을 잃고 ‘소확행’이나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특권반칙에 민감하고 공정을 요구한다. 공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 갑이 을에게 보내는 멸시에 분노한다. 그런 속에서 ‘루저’ 정서를 키워왔는데, 그것이 영화 속 루저 폭발에 공명한 것이다.
영화에 공감했다고 해서 정말 현실에서 영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진 않겠지만, 분노한 루저 조커에게 열렬히 공감하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씩 나오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에서 병들어가고있다는 방증이다. 약자가 멸시와 소외 속에서 방치되지 않는, 포용과 존중으로 공동체의 주체가 되는 그런 사회가 돼야 영화 ‘조커’의 현실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데일리안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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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병든 사회가 충족되지 못한 비참한 젊은이들, 분노한 루저들에게 무엇인가 몹쓸
할 일(?)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는지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다 금주내로 보러갈것
어디서 봤든가 젊은이가 이런말을 한다 "심심한데 강도나 할까!" 우리가 하는 사소한것에 행복을 찾지않고 이 젊은이는 항상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한탕'칠 것만 생각한다 작은일에서 만족을 못느끼는것
이런 사회는 병든 사회다 -블로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