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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올바른 양심을 기르기 위한 덕의 중요성 (24회)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올바른 양심을 기르기 위한 덕의 중요성 

2020-06-25 ㅣ No.585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인간이 올바로 살기 위한 중요한 기준으로서 ‘올바른 의도’라는 주관적 기준과 ‘자연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각자의 체험이 말해 주듯이, 우리가 순간마다 이처럼 다른 기준을 조화시키는 윤리적 판단을 하며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퀴나스도 이런 어려움을 알았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저술한 「진리론」(q.17)에서 ‘양심’(conscientia)에 대해 상세하게 다룬다. 그렇다면 도대체 양심이란 무엇이고, 이것이 왜 중요할까?

 

 

올바른 양심을 형성할 책임

 

아퀴나스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 안에 도덕률의 최고 원리가 되는 ‘영혼의 불꽃’(synderesis)을 지니고 있다. 아퀴나스는 일반적인 도덕의 원리가 구체적인 경우들에 적용될 때 양심이 작용하게 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의도가 객관적인 자연법과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퀴나스의 양심에 대한 언급을 토대로 후대 학자들은 그의 정신을 더 발전시켜서 양심을 세분하고 올바른 양심을 형성할 책임을 강조했다. 우리 주위에는 성장 배경이나 성장 이후의 환경에 따라 왜곡된 형태의 양심을 지닌 사람이 많다.

 

왜곡된 양심의 대표적인 형태로는 ‘이완된 양심’(conscientia laxa)과 ‘완고한 양심’(conscientia stricta)을 들 수 있다. 부모의 무관심이나 사회의 기본적인 규칙마저도 무시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지탄받아 마땅할 행위를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미투 운동’으로 고발된 가해자들이나 ‘n번 방’ 같은 성범죄를 자행하고도 다른 이에게 탓을 돌리는 자들이 이완된 양심의 대표직 예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나 집단생활의 엄격한 규칙으로 말미암아 통제되었던 사람은 조그만 실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받아 부자유스러운 행동을 하기 쉽다. 나아가 자신이 나름대로 설정한 규칙을 타인에게 강요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왜곡된 형태의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양심에 따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성을 지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책임도 지고 있다.

 

 

양심에서 ‘덕’으로

 

사실 개인은 올바른 양심을 형성할 수 있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주제를 아퀴나스는 놀랍게도 그 방대한 「신학대전」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인간의 지성적 능력의 한 부분으로서 ‘영혼의 불꽃’과 양심에 대한 언급(I-II,19,5-6)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앞서 고찰한 흥미로운 내용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대전」 제 II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덕’(virtus)에 관한 이론이다. 그 이유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선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아주 작은 사안까지 자신의 의도가 선한지, 자연법과는 부합하는지,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지 등을 판단하며 결정하려다가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노이로제 증상을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을 도와 윤리적인 선택을 수월하게 해 주는 것이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이어온 덕(ἀρετη)에 관한 이론이었다.

 

 

덕이란 무엇인가

 

이미 소크라테스는 덕이 있는 습성이 올바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돕는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덕이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규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후대의 덕 논의에서 결정적인 규범을 제시한 공로는 그의 제자 플라톤의 몫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세 부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인간의 윤리적인 특성도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 혼을 따라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절제’라는 상태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또한 기개 혼에 따르며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욕망에 종속되면 오히려 ‘비굴함’을 드러내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고자 ‘용기’의 덕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성 혼을 따르는 사람이 국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지식을 가지려면 ‘지혜’의 덕이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이 가장 올바르게 되는 상태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제 일을 하는 경우’이고, 이때 영혼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덕이 필요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4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구체화했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기회가 왔을 때 언제든 주요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이다. 따라서 덕은 자신 속에 ‘잘함’ 또는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하며, 그 계기를 통해서 올바른 행동을 지속해서 해 나갈 수 있다. 더욱이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은 자신의 궁극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닌 품성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그 중간을 실행하는 것, 곧 ‘중용’(中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라고 말한다. 절제도 인색과 마구 돈을 쓰는 낭비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자신의 상태와 그 상황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 하는 윤리적 과제이다.

 

 

고전적인 덕 이론의 체계화

 

플라톤의 4추덕은 단절 없이 이어진 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 이미 초기 스콜라학자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대한 강조는 13세기 중반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번역 소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아퀴나스는 이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절묘하게 종합해 낸다.

 

새롭게 유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에 따르면 덕은 지성적 덕과 윤리적 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이 구분을 「신학대전」에서 직접적으로 수용한다(I-II,58). 이 구분에 따르면 플라톤이 강조한 지혜는 지성, 지식과 함께 지성적 덕에 속한다(I-II,57,2). 따라서 그는 윤리적 덕의 핵심을 이루는 4추덕에서 지혜라는 용어를 ‘현명’(prudentia)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그 순서를 조금 변형시켰어도 4추덕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의 규범에 ‘현명’, 의지의 규범에 ‘정의’, 탐욕적 욕구의 규범으로 ‘절제’, 분노의 규범인 ‘용기’(I-II,61,2), 이 네 가지면 덕의 가장 중요한 근거를 다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지나침이나 부족 때문에 이성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아퀴나스는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인 “덕은 중용을 지키는 데 있다”(In medio stat virtus, I-II,64,1)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도 그대로 받아들었다.

 

더 나아가, 언급된 다양한 덕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강조했다. 윤리적 덕들은 하나의 덕이 다른 덕과 함께 있을 때 완전하다. 현명의 덕 속에 모든 다른 덕들이 뿌리박고 있으며, 이 덕은 다른 덕이 없다면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덕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I-II,65,1).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철학의 다양한 유산이 「신학대전」 안에서 놀라운 체계화와 종합을 이루는 장면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덕에 관해서 아퀴나스는 다만 고대 철학의 계승자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다음에 다루게 될 복음 3덕,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한 진술에서 밝혀질 것이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박승찬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