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속 시리즈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인간의 본성은 원죄 때문에 완전히 타락했는가(26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인간의 본성은 원죄 때문에 완전히 타락했는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교리 가운데 하나는 바로 원죄와 관련된 설명이다. 우리나라 또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연좌제’라는 것이 있었다. 집안 친척 가운데 한 명이라도 월북한 사람이 있으면 공적인 업무에 임용되지 못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제 이러한 비합리적인 관행은 전반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담과 하와라는 원조의 잘못이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다는, 더욱 비합리적으로 들리는 ‘원죄’(peccatum originalis)에 대한 교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제로 근대의 계몽사상이 등장하면서 가장 심하게 공격받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원죄 교리였다. 비판자들은 이 교리를 교회의 권위에 인간을 종속시키고자 하는 단순한 도구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원죄는 어떻게 해서 중요한 교리로서 자리 잡게 되었을까?

 

아우구스티노의 원죄 이론 정립

 

원죄에 대한 단서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라는 로마서 5장 12절을 비롯하여 두어 군데에 더 나타난다. 이에 근거한 초대교회의 단순한 믿음이 정통 교리로 정립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다.

 

그에 따르면, 원죄는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창조주가 원하신 아름다운 질서를 파괴했고 모든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의 근원을 이룬다. 아담의 죄는 선과 악을 알고 규정하는 “하느님처럼”(창세 3,5) 되겠다는 헛된 의지로 신에게 복종하지 않고 반항한 것이었다.

 

이 원죄론에는 육체적인 욕정에서 벗어나려 해도 다시 쓰러지곤 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체험이 반영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원죄론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평생 고심하던 악과 고통에 대한 설명과 연관되어 있다.

 

‘원죄론’은 무죄한 이들도 당하는 고통을 이미 우선 타인들이 행한 죄에 대한 결과로 설명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이론은 아우구스티노 이후 7세기까지도 많은 논쟁을 거쳤지만, 결국 그리스도교의 정통적인 교리로서 인정받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죄론 전통 수용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을 따라, 원죄란 습성(habitus)이라고 본다. 여기서 습성이란, 어떤 한 개인의 기능적인 습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성적 습성(habitus naturalis)을 가리킨다. 이것은 원초적인 정의를 형성하고 있던 조화가 깨지는 데서 ‘거의 본성으로 변화된 성품’이다(「신학대전」 I-II,82,1).

 

아퀴나스는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의 바른 상태인 원초적인 정의(justitia originalis)와 원죄를 대비시킨다. 그 원초적인 정의를 형성하던 조화의 절정은 “인간의 정신이 신에게 복종하는 것”(I-II,82,2)이다. 따라서 원죄의 본질은 인간의 의지가 신을 기피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내용으로는 인간 기능의 내적인 혼란, 곧 “무질서하게 가변적인 선으로 향하는” 정욕(concupiscentia)이라고 할 수 있다(I-II,82,3).

 

원초적인 정의 상태에서는 영혼의 모든 능력이 이성에 복종하고, 육체의 각 부위는 영혼에 복종했다. 원죄로 말미암아 무질서와 혼란이 생기면서 죽음과 고통이 생겨났다(I-II,85,5).

 

오해를 막고자 아퀴나스는 원죄가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입되었다(infusus)고 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인간이 자신이 지닌 죄의 성향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행위로 획득한(acquisitus) 것도 아니다. 원죄는 뿌리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타고나는(innatus per vitium originem) 것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아담의 모든 후예는 아담을 머리로 하는 집단의 구성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본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담과 동일한 인격이다(I-II,81,1). 첫 조상에게서 획득된 것이 자연적 출산을 통해 유전되어, 우리는 죄의 성향을 타고난다(I-II,81,3). 따라서 아담의 후예는 모두 ‘본성의 죄’라 불리는 ‘원죄’를 지니게 되었다.

 

원죄가 원조의 죄로부터 야기되었다면, 여전히 우리와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답하고자 모든 인간이 지닌 썩은 뿌리에 대해 각 개인도 책임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 조상의 죄란 바로 그 썩은 뿌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모든 사람은 자기 뿌리의 잘못된 첫 시작에 대해 똑같은 관계를 갖는다(I-II,82,4). 이런 의미에서 죄의 첫 조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원죄론은 사람들이 현재 짓는 모든 죄에 공동의 뿌리가 있으며, 그 뿌리를 치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본성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원죄 이후의 인간 본성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중요한 차이점을 나타낸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원초적인 정의를 지닌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애초부터 악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일축한 것이다.

 

원죄 이전의 인간은 그 본성에 적합고 선을 얻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I-II,109,2). 이런 힘을 잃어버렸다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은 더는 선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원죄 이후에도 여전히 본성적으로 덕에 이끌린다(I-II,85,1).

 

원죄는 인간 본성을 완전히 소진시킨 것이 아니라 위축시켰을 뿐이다. 만일 죄가 본성의 모든 선을 꺼 버린다면 인간은 더는 이성적 존재자가 아닐 것이고 더는 죄도 지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I-II,85,2).

 

물론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는 자연적으로 덕에 끌리는 힘이 감소하였고, 그 힘은 “죄 때문에 지속해서 감소한다”(I-II,85,3). 그렇지만 인간은 선한 본성의 감소에도 여전히 덕이라고 하는 선에 이끌린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신의 특별한 은총이 없어도 일반적인 진리를 자연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원죄에도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선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일반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롭게 생각해 보는 원죄 교리

 

많은 성서학자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류사의 연대기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 조건의 의미를 밝히려는 의도로 쓰인 고전적 이야기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칸트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은 원죄를 시간상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된다면서, 근본악(radical evil)이란 말로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원죄란 인류의 유전자 어딘가에 손상이 생긴 듯 보는 시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사회악이 널리 퍼진’ 조건 속에서 태어나 살아간다는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많은 신화가 인간이 지닌 모성에 관해 알려 주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원죄라고 불리는 조건 속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스호넨베르크(Piet Schoonenberg)에 따르면, 아기가 성장하여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기 전에, 보편적인 죄의 상태 때문에 그 유아의 인생 출발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난관에 놓여 있다.

 

원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달라진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 또는 열반 등 최종적인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낙관적인 종교가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타락해서 완전히 무력해졌다는 개신교의 입장도 있다.

 

아퀴나스는 인간 본성이 원죄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었지만, 선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손상된 것은 아니라는 중도적인 입장이다.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의 견해에 대해서도 중요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힘만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육화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은총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결과에 도달하지 않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더 깊이 살펴보겠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박승찬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