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5)과학과 신앙의 근본적 차이점2
정반대 접근법 취하는 과학과 신앙… 충돌 발생은 자명한 일
대중적 설득력 얻는 쪽은 과학
신앙의 입지 약한 21세기에
우리 신앙 어떻게 지켜야 할까
발행일2022-03-06 [제3284호, 14면]
저는 지난번 글을 통해서 과학과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현상 또는 사회현상에서 발견되는 경험적인 사실들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고차원적인 법칙, 원리로 나아가는 방식이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나중에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신앙이 더욱 깊어지게 되는 식입니다. 이러한 과학과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은 자연현상 또는 사회현상에서 발견되는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수많은’ 데이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법칙, 원리를 발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관측을 통해 주어지는 데이터의 양이 일단 많아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수많은 데이터로부터 장소,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보편적 법칙을 찾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인간의 역사 안에 주어진 ‘유일회적인’ 계시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탄생되고 퍼져나갑니다. 여기서 신앙의 내용인 계시는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단 한 번 주어지며 결코 반복되지 않는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모세가 경험한 ‘불타는 떨기나무 사건’(탈출 3장)은 인류 역사 안에서 오직 모세만이 그의 평생 안에서 단 한 번 경험한 것이죠. 그래서 유일회적인 계시 내용은 그 자체로는 결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계시 내용을 접한 여러 사람들이 그 계시 내용과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며 그 계시 내용은 점차 권위를 얻어 나가게 됩니다.
과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특정한 법칙을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예외적인 사건은 거짓 혹은 관찰의 오류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데이터에 의존하는 과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 ‘유일회적인’ 사건을 계시라는 차원으로서 이해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과학이 보기에는 그러한 유일회적인 사건은 ‘측정의 오류 내지는 데이터의 조작’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유일회적 부활 사건이 그들의 관점에서는 측정의 오류(누군가가 헛것을 본 것)나 데이터의 조작(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부활을 거짓 주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특정한 법칙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고유성’이 있으며, 그 고유성 안에서 활동하시는 신적 존재의 계시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유일회적인’ 주요 사건들의 초자연성과 특별함을 과학이 단지 ‘단 한 번 발생했다’는 이유를 들어 평가절하하는 것은 신앙의 권위를 훼손하는 모욕적인 태도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은 법칙이라는 보편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들의 개별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신앙은 특정한 계시 사건이라는 개별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들의 보편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이렇듯이 과학은 신앙과는 사실상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과 종교 간에 긴장과 갈등이 생겨나고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명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극명한 차이에 입각해 볼 때 만일 과학과 신앙, 양쪽이 충돌할 경우 ‘어느 쪽이 대중적으로 더 설득력을 얻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 본다면 과학이라고 답변하는 이들이 압도적일 것입니다. 과학은 누구나 확인 가능한 보편성이 있으며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반면, 신앙은 주요 계시 내용을 극소수만 확인 가능하며 과학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비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아니지만, 개신교에서 현재까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과학과 신앙 간의 충돌의 구체적인 예로 창세기 1~2장에 제시된 ‘우주의 나이 계산’ 및 ‘인류 첫 조상의 창조’ 등의 문제를 들 수 있겠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에서는 아직도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류의 첫 조상이 지금부터 대략 6000년 전에 하느님께서 행하신 6일간의 창조로 인해 생겨났다고 믿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입장 때문이죠.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최근까지 행한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138억 년 전에 있었던 빅뱅이라는 사건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출현은 찰스 다윈 이래로 발전해 온 진화론에 의해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창세기 해석 문제는 사실 신앙의 중요한 텍스트인 창세기의 내용이 자연과학, 특히 우주론 및 진화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심각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글자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소수의 근본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을 제외한 오늘날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과학의 내용을 신앙의 내용보다 더욱 신뢰하는 현대의 사회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글자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소수의 근본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조차도 소위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그들 나름의 과학적 접근법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 내용을 옹호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이죠. ‘창조과학’은 그들이 결국 스스로 ‘과학’이라고 부르는 방패를 이용해야만 할 정도로 과학적 방법론이 현재 신앙의 내용에 근본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는 상황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되겠습니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볼 때, 과학과 신앙 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과학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과학들이 발전해 감에 따라 신앙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점점 약해져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역사상 신앙의 입지가 가장 약한 시대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김도현 바오로 신부(서강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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