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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휴머니즘

[삶과문화] 여전히 휴머니즘/ 입력 2022. 04. 22. 22:47 댓글 0

살인 용의자 이은해 팬카페 생겨
'예쁘니 용서' 절대로 용납 안돼
범법 행위 정당한 대가는 기본
인간성 갖춰야 권리 부여 합당

어머니 모신 지 구 년째, 어머니는 나날이 늙고 그만큼 서울 나들이가 쉽지 않다. 누군가 나를 보려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야 한다. 그래서 우리 집 손님은 귀하디귀한 존재다. 나밖에 모르는 어머니는 나 찾아주는 손님들이 고마워 어찌 아는 사이냐, 뭐 하는 사람이냐, 꼬치꼬치 묻는다.

나를 찾는 사람 중 절반은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가르친 제자들이다. 마흔이 넘거나 가까운 제자 태반이 아직 미혼이다. 비혼주의자도 적지 않다. 어머니는 늙도록 결혼 안 한 제자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어머니가 결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식이다. 몇 번이나 설명했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한 어머니가 자꾸 묻기에 어느 날은 짜증을 냈다.

정지아 소설가

“낳기만 하면 뭐 할 거야? 잘 키워야지.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대. 낳아만 놓고 먹이지도 가르치지도 못한 옛날 사람들보다 낫잖아?”

어머니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이해시키려 오만 가지 방법을 써봤다.

“엄마, 꼭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 해? 요즘 사람들은 자기 인생도 소중해. 결혼해서 밥하고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것보다 자기 인생이 더 소중한 거지.”

 

생전 욕해본 적 없는 어머니가 웬일로 성질을 냈다.

 

“썩어빠질 놈의 시상이다. 부모고 자식이고 나 몰라라, 지배끼 모르는 시상이 돼부렀그마이.”

자기가 무엇보다 소중해진 세상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을 꼭 고루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신문에서 살인 용의자 이은해씨의 팬 카페가 생겼다는 기사를 읽었다.

 

“범죄는 중요하지 않다. 얼굴이 중요하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

 

팬 카페가 내건 문구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류 역사상 예쁜 여자가 특별취급을 받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범죄를 저질렀다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이은해씨의 팬들은 예쁘니 범죄도 용서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는 누구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세상이 되었다. 소아성애자나 변태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 동물학대를 하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소통하며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많다. 사이코패스도 있고 소시오패스도 있으며, 사디스트도 있고 마조히스트도 있다.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다 소중한 개인이므로, 개인의 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이므로, 우리는 그들 모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부모의 가슴에 슬픔을 안길 수는 있겠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인구 증가로 몸살을 앓는 지구의 입장에서는 그들이야말로 구원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인, 성폭력, 폭력, 동물학대, 갑질 등등은 누군가의 신체와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다.

 

그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개인의 자유, 권리, 개성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한 개인이 소중한 것은 그도 인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개인은 인간성이라는 것을 갖고 있어야만 인간으로 존중받고, 개인의 권리도 누릴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쓴다. 소설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다. 단 휴머니즘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아름답고 흥미진진해도 인간성을 부정하거나 공격하는 이야기는 소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중적 흥미를 위해 살인이나 폭력을 과도하게 등장시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악당은 제아무리 돈이 많고 잘생겨봤자 결국은 죽거나 잡힌다. 어떤 체제든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식과 도덕, 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더 다양해지고 더 확장되어야 한다. 휴머니즘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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