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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 일상의 신학 - 늙어감과 소멸에 대한 신학적 단상

가톨릭신문 : 발행일 2021-04-04 [제3238호, 12면]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 일상의 신학 - 늙어감과 소멸에 대한 신학적 단상

 

신앙 안에서 걸어가는 노년의 길은 곧 완성을 향한 길

늙어가면서 나이 의식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일 잦아져 / 몸과 마음 위축됨 느끼고 모든 것에서 소멸의 흔적 발견
늙음의 시기도 의미는 있어 청춘 생각하며 아무것 안 하는 어리석음으로 살고 싶진 않아
죽는 순간까지 공부·성찰하고 일상적 수행 계속해야 할 것

 

■ 늙어가는 몸을 바라보며
언제부터인지 부쩍 나이를 의식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것들에서 소멸과 죽음의 흔적을 발견한다. 새해를 시작한다는 설렘은 사라졌고 달력의 날들이 가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지 못한다. 의식 속의 나는 늘 그대로의 나인데, 몸은 세월의 풍화를 고스란히 견뎌내고 있다. 공부할 수 있는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몸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내 생을 지탱하며 나를 끌고 온 내 몸이 고맙고 대견하다. 타인과 세상의 시선 속에서 불편해지는 노년의 몸이라 할지라도, 내 자신만이라도 그 늙은 내 몸을 사랑하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늙는다는 것은 몸이 노화된다는 뜻이다. 더 읽지 못하게 하는 노안, 감각들의 전반적인 약화, 몸의 균형과 조절 능력의 쇠퇴가 괜히 서럽다. 늙은 몸은 타인의 시선에서 배제된다. 때때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노년의 시기가 길어진 오늘의 세상은 늙음과 늙은 몸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지고 있다. 그래도 슬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 산다는 건 감각의 향연
늙어가면서 뜻밖에도 몸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흔히 정신과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철학과 신학은 몸보다는 정신과 영혼을 더 강조해왔다. 하지만 적어도 이승의 삶 안에서는 정신과 영혼은 몸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정신과 영혼이 깃드는 자리이며 토대다.

몸은 감각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보고(시각), 듣고(청각), 맛보고(미각), 만지고(촉각), 냄새를 맡는다(후각). 우리의 생은 어쩌면 이 감각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욕망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생동함의 감각이다. 죽음은 이 감각의 상실을 뜻한다.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고 만질 수 없고 그리운 향기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소멸은 슬프다.

황동규 시인의 최근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에는 소멸이 가까워지는 시간 앞에서 감각의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시인이 사랑했던 감각은 무엇보다 청각과 시각의 즐거움이었다. 시집 안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음악을 듣는 일, 차를 타고 가서 조우하는 다양한 장소의 풍경들을 응시하는 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들의 우연한 정경을 바라보는 일에 관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오디오에선/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노래하고 소리로 몸부림치고/ 소리로 깊어진다.”(‘이 겨울 한밤’)

“세상이 느닷없이 모습 바꾸는 곳과 만나는 일은/ 삶이 어쩌다 던져주는 짜릿한 선물.”(‘홍천 구룡령九龍嶺길’)

“산책길 언덕, 흰 눈 막 비집고 나온 노란 복수초 보고/ 이런 게 바로 사는 맛 어쩌고 하며 자리 뜨지 못하다니.”(‘대낮에 밤길 가듯’)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다.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늙어가는 몸이 서러운 이유는 감각은 시들어가고 몸의 아픔만 선연하기 때문이다. 늙은 몸의 감각은 생동하는 감각이 아니라 고통의 감각이다.

“감각은 시들어도/ 아픔은 방금 뱀 입에 물린 개구리같이 생생하다.”(‘일곱 개의 단편斷片’)

늙은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늘 하루만이라도” 감각의 향연을 만끽하는 일이다. “그래, 다시 하루다/ … /언젠가 몸이 망설이다 마음 덜컥 내려놓으면/ 그 방향에서 생판 모를 형상으로 죽음이 동틀 거다.”(‘삶의 앞쪽’)

늙는다는 것은 쓸쓸하고 서러운 일이며, 소멸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노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완성을 향한 길이다.

 

■ 신앙 안에서 잘 늙어간다는 것은

늙음은 몸과 마음을 위축시킨다.

“삶의 폭 점점 졸아들다/ 조그만 포구 되었다.”(‘조그만 포구’)

“노인들은 자신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체성과 자아가 작아진 느낌을 받는다.”(마사 누스바움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중) 이 비대칭적 의존이 주는 두려움과 위축감이 역설적으로 공격성과 폐쇄성을 낳는다. 지혜롭고 관대한 노인에 대한 이상(理想)은 오늘의 시대에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허울들을 벗어버리고, 때론 탈속한 포즈를 취해보기도 하지만, 잠깐의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노년을 담담하게 수용하고 잘 늙어가는 사람이 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신앙인은 매일의 삶을 예수의 이야기에 관계시키고 준거점을 두는 사람이다. 그런데 젊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노년에 관한 함의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신앙의 전통 속에서 지혜롭게 노년과 소멸을 맞이한 신앙의 선인들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내면적이고 신앙적인 수용을 강조한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모든 세대는 그 자체로 고유한 양식과 가치를 지닌다. 생을 계획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세대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기 어렵다. 삶의 끝자리에서 우리는 자기 생의 전체 맥락을 생각하게 된다. 노년의 시기는 용기와 정직성을 갖고 삶의 전 문맥을 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직시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죽음은 이승에서의 소멸을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앙적 완성을 의미한다.(로마노 과르디니 「삶과 나이」) 신앙 안에서 노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완성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희망하며, 노년의 시간 역시 기쁨으로 살아야겠다고 의지를 다잡는다.


■ 살아온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도 늙는다는 것은 쓸쓸하고 서러운 일이다. 여전히 소멸이 무섭고 두렵다. 이성과 의지는 노년과 소멸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만, 감정과 정서는 이성적 성찰과 의지적 신념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지난 시절 감각의 기억들이 향수처럼 떠오른다.

하지만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가긴 싫다. 청춘의 시기가 탈렌트 다섯의 시간이라면, 노년의 시기는 탈렌트 하나의 시간일 것이다. 다섯 탈렌트를 부러워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탈렌트를 땅에 숨겨두는 어리석은 종의 모습으로 살고 싶진 않다.(마태 25,14-30) 늙음의 시기 역시 그 나름의 역할과 의미가 있으리라 희망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공부하고 성찰하고 일상적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삶이 아름답지 않으면 죽음도 아름답지 않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오늘을 신앙으로 살아낸다면, 내일도 신앙으로 맞이할 것이다. 그 언젠가의 내일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