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입니다 2017년 4월 13일 가톨릭평화신문 여론 27면
(말과 침묵) 메시아는 오지 않는다
그분이 떠나던 아침은 쌀쌀했다. 지지자들은 전날 저녁부터 몰려와 밤을 새웠다. 골목은 태극기로 넘쳐났다. 구호와 탄식과 비명이 뒤섞였다.
“우리가 죽더라도 대통령을 살려야 합니다!” 수십 명이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대통령님을 절대 못 보냅니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다. 이윽고 검은 승용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분은 품위를 잃지 않았다. 엷은 미소로 눈인사를 건넸던가? 짙은 유리 너머로 손을 흔드는 모습이 살짝 비쳤다. “불쌍한 우리 대통령님!” 그날 몇몇은 탈진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렇게 그분은 떠났고 돌아오지 못했다.
기억은 거슬러 오른다. 십여 년 전, 이번에는 수의학을 전공한 어느 교수님이다. 그분은 저명 학술지에 생명 복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어느 정당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검토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에게는 ‘황빠’로 불린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한 어리석은 언론이 연구윤리 문제를 제기했다가 커다란 역풍을 맞았다.
나중에 논문이 조작으로 드러났을 때도 그들은 끝까지 믿지 않았다. 곤경에 처한 그분을 돕기 위한 난자기증운동이 불길처럼 번졌다. “교수님 사랑해요, 제 난자를 드립니다.” “난치병 치료의 길을 꼭 열어주세요.” 기증자가 나타날 때마다 누리집 대문에는 무궁화 꽃이 한 송이씩 늘어났다. 마침내 기증식이 열리던 날, 그분의 연구실 앞에는 진달래꽃이 길게 깔렸다. “1,000명의 난자를 기증합니다. 교수님, 사뿐히 즈려밟고 돌아오세요.” 몇몇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종교적인 민족일까? 정치도 종교가 되고 학문도 신앙이 된다. 누군가를 숭배하고 떠받드는 열정이 가히 종교의 수준을 넘나든다. 그들은 교주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를 준비가 돼 있다. ‘박빠’나 ‘노빠’, ‘황빠’는 그런 신흥 종교의 신도들이다. 그들의 교주는 억압과 탄압 속에 고난의 길을 갔다. 그럴수록 그들의 믿음은 깊어진다. 그분의 변호인이 외쳤다 “예수도 군중재판으로 십자가를 졌다.” 보라! 불의한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메시아가 여기 있노라.
그렇게 우리의 구세주는 갔다. 화려한 비상이었으되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황홀한 비행은 충격의 불시착으로 끝났다. 추종자들의 비통한 울음이 이어진다. 영웅의 부재를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목 놓아 그 이름을 부른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다. 대중은 차라리 마약 같은 위로를 원한다. 애초에 진실 따윈 중요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세상에선 거짓 희망이라도 붙들어야 한다. 종교는 내세의 구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너무 멀리 있다. 당장 눈앞의 불안과 슬픔을 달래 줄 현실의 구세주가 필요하다.
모세가 산으로 간 뒤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백성들은 초조해졌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고서야 비로소 안도했다.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축제를 선포했다. 번제물을 올린 뒤 먹고 마시다가 흥청거리며 놀았다.
또 한 번의 선거를 앞에 두고 우리는 새 지도자를 찾는다. 저들 중 누군가는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너무 쉽게 ‘호산나’를 외치지 말지어다. 저들은 대중의 욕구를 버무려 장밋빛 공약을 만든다. 공기를 휘저어 화려한 신기루를 빚어낸다.
메시아는 오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다. 대중은 우상을 세우고 또 부순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일 뿐이다. 환상이 깨질 때쯤 깊은 절망이 찾아온다. 금송아지 숭배는 결국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불태우고 가루로 빻아 마시는 것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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