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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버지’ 임피제 신부, 하느님 곁으로(2018. 04. 29발행 [1462호]) 가톨릭평화신문
▲ 미국 텍사스에서 후원금을 모금하는 장면. 돈을 많이 모금하기 위해 큰 돼지 저금통을 만들었다.
60여 년 전 가난밖에 남은 것이 없는 섬 제주에 도착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궈낸 선교사 임피제(Patrick J. McGlinchey) 신부가 23일 선종했다. 향년 90세.
아일랜드 출신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 임 신부에게 제주도와 성 이시돌 목장은 삶의 전부였다. “주님이 가라는 곳은 어디든 가고, 시키는 일은 뭐든 하겠다”고 약속하고 25살 나이에 들어간 제주에는 4ㆍ3 사건과 6ㆍ25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에 허덕였다.
복음과 더불어 주민 자립 위해
복음을 전하러 갔지만, 성경보다 삽을 먼저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새끼를 밴 돼지 한 마리를 인천에서 사다 양돈사업을 시작했다. 그 목장을 기반으로 여성 1300여 명을 고용하는 한림수직을 세우고, 그 수익금으로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주민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다.
특히 양돈사업은 오늘날 제주의 축산 기반이 됐기에 제주 사람들은 그를 ‘푸른 눈의 돼지 신부’라고 부른다. 교육사업을 포함해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벌인 모든 사업의 저력은 주님에 대한 신뢰와 서양인 특유의 개척 정신에서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던 청와대 관료들은 우연히 성 이시돌 목장을 둘러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만 마리 돼지와 수천 마리 소, 수천 마리 양을 기르는 한라산 중턱의 수백만 평 목장 풍경은 충격이었다. 이 때문에 임 신부는 박 대통령 앞에서 성공사례 브리핑까지 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신부님,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호스피스 병원 사업도 시작
그가 정작 고심한 것은 주민들의 자립이었다. 젊은이들이 앞장서는 농촌개발 운동 4-H 클럽을 제주에 확산하고, 가축은행을 만들어 종자를 퍼뜨렸다. 종잣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신협도 조직했다. 그는 애초부터 주민들에게 “동냥하기 위해서만 허리를 굽히지 말고 일하기 위해, 기도하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았다. 제주가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자 인간다운 삶을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손댄 것이 2002년 무료 호스피스 병원 사업(성 이시돌 복지의원)이다.
그의 수상 이력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열거하기가 어렵다. 2014년 제주 MBC가 주관하는 제1회 ‘자랑스러운 제주인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그는 은퇴했다는 이유로 수상을 사양했다. 하지만 “상금이 1000만 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시상식에 갔다. 무료 호스피스 병원 운영비가 쪼들릴 때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는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3)이다.
고인의 장례 미사는 27일 성 이시돌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봉헌됐다. 유해는 그의 꿈과 땀, 기도가 배어 있는 성 이시돌 목장 묘역에 안장됐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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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제 신부를 본적있다 20대 때 제주 '글라라수도원'이라는 봉쇄수도원이다 낮에 잠간 나왔는데 트랙터인지 해튼 탈것에 유아들, 어린이들 초1짜리 등 어린이를 한국사람이 태우는데 시간이 걸린다 아이들이라 얼른 올라타지 못하니까 한참을 실갱이하다시피하며 태운다
당시는 한여름이었다 작렬하는 태양하래 임신부는 재촉도 안하고 연민의 눈으로 아이들을 쳐다보는것을 멀찍이서 봤다
지금 사진하고 크게 틀리지 않는데 다만 좀 젊었을때였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뵈는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고생하는것을 보며 거룩한 성직자의 모습을 봤다 특히 아련히 쳐다보는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젊었을때의 임신부는 상당히 잘생긴 편이다 자기의 모든것을 버리고 타국에서 고생하며 그때 한국은 가난하지만 한창 수출드라이브로 많은것을 수출햇다
세상은 이런 자기회생하는 사람들이있어 유지되는것이 아닌지
부디 천상영복에 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