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신돈은 누구인가

고려의 신돈을 알아본다

 

한국에 최순실이 있다면 고려엔 신돈이 있었고 조선에 정난정, 러시아는 라스프틴이 있다 오늘은 '신돈'을 살짝 들여다본다

 

 

조선의 전신은 고려다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명교체라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고(1349년 충정왕1년) 고려로 돌아왔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를 몹씨도 사랑했다 그녀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때부터 시름에 잠겨 정사는 신돈에게 맡기고 죽은 공주를 밤낮으로 그리워했다

그래서 공민왕 업적은 노국대장공주의 사전과 사후가 전혀 다르다고 한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이다 12살때(충혜왕 복위 2) 원나라가 가서 10년이나 머물렀다

 

1351년 충정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하며 몽고식의 변발과 호복을 폐지하고 고려만의 "우리는 우리것만으로"하는 자주적인 전통을 내세우자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로 힘들어졌다

 

노국대장공주 사후  한참 그리움에 잠겼을때 신돈이 나타난다 신돈은 원래 노비의 자식이다

사람은 자고로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에 참여한다 그의 승진은 대단하다 그가 받은

'섭리' 관직의 자리는 고려사에  이성계와 신돈만이 기록됬다고 한다

 

신돈은 자기가 누군지 잘안다 노비들의 어려움도 안다 기득권이나 권문세족들을 제치고 민중들의 고통을 해방시켜주는 일부터 처리한다 그러나 잘사는 기득권층이 이런 일을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못본다

 

 

'전민변정도감'이라는 즉 억울하게 뺏긴 땅을 백성들에게 주고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백성들을 불어주는 제도 인데  신돈이 왕에게 설치할것을 청원하여 설치되었다

신돈은 꾀를 내었다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 기한을 주고 권문세족들과 호족들이 강제로 탈취했던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천민이나 노예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호소하는 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양민의 자리를 주고 했으니  백성들에게는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반대로 권문세가와 기득권층은 격분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고려 후기의 개혁 기관으로서,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악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특별기구이다 충렬왕14년 1288년, 우왕7년 1381도 설치하였다 )

 

반대하는 세력들은 별 이상한 소문으로 신돈을 맹렬히 비난하고 저항했다 벼라별 흉측한 소문을 내다가 나중에는 늙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했을거라는 말도 했다

왕이 생각하기엔 기득권층을 대항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느껴 신돈을 적극 신임한다

신진관료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개혁하여 젊고 깨끗한 신진정치가들이 필요했다

 

신돈과 공민왕의 개혁은 실지 공민왕의 지지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최순실도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그만큼 세력과 그 무엇을 얻을 수 없었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이런말도 했다

"다른 사람의 참소를 믿지 않아야 세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

최순실은 이런말은 안했지만 거의 그런 준으로 행동 했을 것이다

 

공민왕은 신돈의 이런말에 "스승이 나를 구하고 내가 스스을 구하여 어떤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것이나 오늘의 맹세는 불천이 증명하리라" 하고 서약을 했다 그만큼 공민왕은 신돈을 신뢰했다

천금같은 왕의 서약서도 굳은 맹세도 그리오래 가지는 못했다 

 

 고인물이 썩듯이 권력이란 한곳에 머물면 사단이 난다 적극 신임을 하고보니 권세가 여간아닌것을 봤다 신돈은 사심관제를 부활시켜 자기가 5도 사심관이 되려는 야망을 가졌다는것을 왕이 알았다

왕은 아무리 신뢰하는 신하라도 세력이 커지면 안된다는것을 알아 신돈을 제거한다

신돈은 왕이 자기를 의심한다는것을 알아차렸고 반대로 공민왕을 죽이려고 하다 발각되어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참살당한다

 

죽기에 앞서 신돈은 그전에 제게 써주신 서약을 벌써 잊으셨나며 "대왕의 맹세가 부끄럽지 않으신지요?라며 죽기직전까지 역모를 인정  안했다

고려사에서는 신돈을 '요승'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고려사는 누가 썼을까?

고려사는 조선건국세력에 의해 쓰여졌다 역사는 승자가 쓴다

 

나쁜일도 했지만 윗글에서 처럼 천민과 노비를 해방시키고  백성들의 빼앗긴 땅도 뒤찾아주는 일도 했다

권력의 맛을 보면 좀처럼 내려오기 힘들다고 한다

이처럼 신돈은 좋은일을 하고 저만치 물러났어야 한다 정치계는  주로 흙탕물이다 오래 있을수록 안좋다 

 

1367년 성균관을 순수 유학교육기관으로 개편하여 성리학 부흥에도 힘썼다 

신돈이 집권중  기득권자들 권문세력가들을 제거하면서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개혁적인 정책을 펴려고 했고 성균관을 개편해 신진사대부층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개혁추진을 할 지지기반이 없었도 말년에는 자기관리에도 소홀했다 이것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아래는 공민왕과 고려를  쉽게 알기위해 에니메이션인데 한번쯤 봐 둘만~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부는 이심동체다  (0) 2016.12.20
못 말린다   (0) 2016.12.19
명종때의 정난정  (0) 2016.12.18
라스푸틴과 최순실  (0) 2016.12.14
남양성지 다녀오다  (0) 2016.12.13